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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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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등록 2011-08-31 16:07 수정 2020-05-03 04:26

신약성서에 ‘오병이어’(五餠二魚) 이야기가 나온다. 유대 해방 축일인 유월절 기간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 빈 들에 모인 5천여 명의 민중을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 먹였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돈은 받지 않았다.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빼고는 유일하게 4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마태 14:13~21, 마가 6:31~44, 누가 9:10~17, 요한 6:5~15). 그만큼 기독교 신앙에서 각별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신적 능력과 함께, 기독교 신앙의 바탕에 ‘먹는 문제’로 차별하지 않는 나눔과 공생의 정신이 있음을 강조한 이야기다.
지난주 한국 사회는 서울시의 전면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로 소란스러웠다. 그런데 개신교계의 일부 대형 교회는 주민투표 과정에 적극 개입했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8월21일 설교에서 “무상급식·무상의료 같은 복지정책 때문에 우리 경제가 몰락 위기에 직면했다”고 했다. 소득세도 내지 않으며 ‘복지 포퓰리즘’을 탓하는 자가당착은 논외로 하더라도, ‘오병이어’의 정신을 부정하는 목사의 설교는 난감하다. ‘온누리교회에서 온 문자’로 알려진 8월22일 문자메시지는 “곽노현 교육감의 ‘학생인권조례안’ 통과되면… 초중고생 동성애자 급증하고… 교회가 깨어 기도하고 일어나지 않으면 이 나라가 무너집니다. 꼭 투표해서 곽 교육감 물리칩시다”라고 호소했다. 문자 송신자는 ‘사탄의 발호’(?)를 막으려는 절박한 심정이었겠지만, 논리 비약은 처참하다.
이전에는 종교가 사회의 안녕을 걱정했는데, 요즘은 사회가 종교를 근심하는 세상이 됐다. 종교의 정치 개입, 정치와 종교의 유착, 일부 종교인의 종교 다양성 불인정 행태 등이 심각해지고 있어서다. ‘종교의 자유’와 함께 ‘국교 불인정’ ‘정교 분리’를 명문화한 헌법 정신(제20조)이 풍전등화의 처지다.
‘종교의 자리’에 대해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한 주민투표 하루 전인 8월23일, 이 문제와 관련한 한국 사회의 고민을 더 깊고 넓게 할 불쏘시개가 될 역사적인 문건이 발표됐다. 대한불교조계종 자성과쇄신결사본부 화쟁위원회(위원장 도법 스님)가 공개한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21세기 아쇼카 선언(초안)’(이하 ‘선언’)이 그것이다. ‘선언’은 거의 모든 거대 종교의 독트린인 절대 진리관을 부정한다.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 있습니다. 불교는 이웃 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 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선언’은 생명의 본질로서 다양성, 곧 차이의 존중을 호소한다.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것들의 어울림입니다. 다양성은 생명의 실상이며 생명 활동의 발로입니다.” ‘선언’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다인종사회, 다문화사회, 다종교사회로 이해한다. 그러곤 “‘나만의 진리’를 고집할 때 종교는 평화와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라 분열과 폭력의 메시지가 될 뿐”이라며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믿느냐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선언’이 ‘종교 다양성을 실천하는 최소한의 원칙’으로 ‘상호존중의 호혜성’을 제시하며 “종교 다양성 자체를 부정하는 관점을 다양성의 이름으로 용인할 수 없다”고 강조한 배경이다. ‘앵톨레랑스’(불관용)를 거부하는 ‘톨레랑스’(관용)의 태도와 같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 활동’과 관련한 내용이다.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으며 민주주의의 이념과 절차를 지향하는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이 믿고자 하는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자유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을 자유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공적 영역의 종교 자유는 민주적 이념과 시민적 상식에 부합돼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믿음을 전하기 위해 공적 지위나 권력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선언’ 초안은 조계종단 각급 단위의 의견 수렴을 거쳐 오는 10월에 최종안이 발표될 예정이다. 이 논의가 조계종단과 불교계를 넘어 모든 종파로 널리 퍼지길 바란다. 사랑과 자비와 평화의 이름으로!
한겨레21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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