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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코리아의 아버지

등록 2011-06-01 11:09 수정 2020-05-03 04:26

한국전쟁을 앞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박헌영 외상은 김일성 내각 수상한테 호언장담했다. “조선인민군을 남조선으로 내려보내면 남로당원 20만 명이 호응할 것”이라고. 북한군은 전쟁 발발 나흘 만에 서울을 차지했지만, 박헌영이 장담한 ‘20만 명의 봉기’는 없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리더십 덕분은 아니다. 이 대통령은 전쟁 발발 사흘째인 6월27일 새벽 2시 대전으로 피신했다. 그뒤에도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이 대통령의 연설과 “서울을 사수한다”는 국군의 다짐이 라디오 방송으로 되풀이됐다. 6월28일 이른 새벽 국군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당시 하나뿐인 다리였다. 다리를 건너던 500명 이상이 폭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렇게 한강 이북에서 인민군을 막던 병사들과 시민들을 팽개쳤다.
‘20만 봉기’ 부재의 비밀은 따로 있다. 알짬은 한국전쟁 직전 단행된 농지개혁이다. 역사가 알려주는바, 땅을 가진 농사꾼은 전쟁이나 혁명에 몸을 던지려 하지 않는다. 1945년 말 전체 경지면적의 35%였던 자작지의 비중은 농지개혁 실시 직후인 1951년 말에는 96%로 급증했다(전강수, ‘평등지권과 농지개혁 그리고 조봉암’, 2010년 봄). 지주제가 해체되고, 자작소농 체제가 성립됐다. 유랑하던 농민들은 자기 땅에 뿌리를 내렸다. 이들이 가족의 삶을 가꾸며 꿈을 키울 땅을 버리고, 전쟁의 이념에 목숨을 걸 이유가 있었을까?
농지개혁을 통한 자작소농 체제의 출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해방된) 신생국 가운데 대한민국이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 달성한 예외적 국가로 발전한 역사를 해명할 열쇳말이다. 클라우스 다이닝거의 연구에 따르면, 토지가 공평하게 분배된 나라일수록 장기 경제성장률이 높다. 식량 증산, 교육 확산을 통한 우수 노동력의 양성, 신흥자본가의 출현이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셋은 자본주의적 공업화의 필수 요소로 불린다. 다이닝거에 따르면 한국은 대만, 일본, 타이 등과 함께 초기 토지분배가 가장 공평한 경우에 해당한다. “토지개혁으로 조그만 땅뙈기를 갖게 된 수많은 자영 농민들의 자발적 중노동과 창의력이, 그 말릴 수 없는 교육열이 오늘날 대한민국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기적을 만든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분석(주대환, )은 정곡을 찌른 셈이다. 일제시대를 거치며 신분제가 해체된 데 이어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무너지자 한국 사회는 사회이동의 용광로가 됐다. ‘다이내믹 코리아’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만든 게 아니다.
한국의 농지개혁엔 농민층의 강력한 요구, 북한의 토지개혁(1946년 3월)과 그 영향을 차단하려는 미국의 적극적 역할, (지주세력 중심의) 한민당을 견제하려는 이승만의 정치 전략 등이 두루 작용했다. 하지만 농지개혁의 아버지는 따로 있다. 대한민국의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온갖 난관을 돌파하며 농지개혁을 기획·추진·집행한 조봉암이다.
죽산 조봉암이 누구인가? 조선공산당 간부로 일제에 맞서다, 해방 직후 박헌영의 좌경 노선을 비판하며 사상 전향을 선언했다. 그러곤 대한민국 제도정치에 뛰어들어 중도 노선을 걸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1956년 5월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4천여 표를 얻어 이승만(504만6천여 표) 독재에 맞설 정치적 구심으로 떠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 ‘진보당 사건’을 빌미로 간첩죄로 사형선고를 받아 1959년 7월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당시 ‘사법살인’이라 불렸다. 그는 2011년 1월20일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됐다.
5월20일 한국현대사학회가 출범했다. 가 ‘한국 현대사 바로 세우자’는 이름으로 4차례에 걸쳐 기획 기사를 내보내는 등 보수 언론과 정치권의 관심이 뜨겁다. 이 학회는 “대한민국 60년의 발자취를 사실과 진실 그대로 서술”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들이 현대사의 중심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부국의 아버지 박정희’를 세우려는 노력의 1%만이라도, 농지개혁으로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다진 조봉암 연구에 쏟아붓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려보자.
한겨레21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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