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onimo EKIA(Enemy Killed In Action)!”(제로니모(라는) 적을 작전 중 사살했다!) 리언 파네타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5월1일 오후 5시(현지시각) 버락 오바마 대통령한테, 오사마 빈라덴 사살 사실을 보고할 때 쓴 표현이다. ‘제로니모’는 알카에다의 최고지도자 빈라덴을 일컫는 CIA의 코드명이다.
제로니모가 누구인가. 삶터를 침탈한 멕시코인과 백인 이주자들에 30년 넘게 맞서 싸운 아메리카 원주민 아파치족의 전설적인 전사다. 사후에 스무 편이 넘는 영화가 만들어졌을 정도로 ‘신출귀몰하고 용맹스러운 인디언’의 상징이다. 영화 의 주인공 조수가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며 그랬듯이, 지금도 미군의 신참 낙하병과 어린이들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때 ‘용기를 달라’며 “제·로·니·모!”를 외친다. 가톨릭 성인의 이름이기도 한 제로니모는 멕시코군이 붙여준 별명일 뿐, 본명은 고야클라, ‘하품하는 사람’이다. 1886년 미군에 항복했는데, 그 뒤로 고향 (지금의 뉴멕시코주) 질라 땅을 밟지 못하고 1909년 오클라호마주 포트실의 인디언 죄수 묘역에 묻혔다. 임종을 지킨 조카에게 “항복을 후회한다”고 했단다.
‘빈라덴=제로니모’라는 CIA의 작명에 깔린 생각은 무엇일까. 둘이 신출귀몰·용맹이라는 특징을 공유했다고 본 걸까, 아니면 ‘반드시 제거해야 할 미국의 적’이라는 판단 때문일까. 오바마는 오사마를 ‘제거’했다고 밝히는 기자회견에서 “정의가 실현됐다”며 “미국이 추구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거듭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필라델피아 야구장에서 백악관 라파예트 광장까지 미국인들은 “U-S-A” “Yes, We Can”을 합창했다. 파네타는 빈라덴의 소재를 알아내려고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을 고문했느냐는 질문에 “Absolutely Correct”(전적으로 사실)라고 답했다. 200여 년 전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을 정당화하고자 프로테스탄트 백인 이주자들이 외쳤던 “Menifest Destiny”(명백한 사명·미국은 북아메리카 전역을 지배하고 개발하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주장)를 상기하게 한다. 미국인이 아닌 다른 지구인들이 그 말을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일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고문을 금지한 국제법과 타자의 존엄을 위한 자리도 없다.
알카에다는 반발했다. 온라인 공식 메시지 창구 노릇을 해온 ‘아사드 알지하드2’는 “이슬람은 수세기에 걸쳐 모든 쪽으로부터 공격당했고, 빈라덴은 그들을 막는 둑이었다”며 “지하드(성전)를 재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방의 이슬람 모욕을 강조하며 ‘피의 복수’를 선동하는 정치적 수사다.
냉전 이후 21세기 세계 정치의 열쇳말이 된 ‘정체성’ 문제를 파고든 프랑스 정치학자 도미니크 모이시의 분석(·랜덤하우스)에 빚대자면, 미국의 ‘오만’엔 이슬람권의 팽창에 맞닥뜨린 서구의 ‘공포’가, 알카에다의 ‘핏빛 저항’ 선동엔 무슬림들의 역사적 ‘굴욕’이 어른거린다. 그러나 단순화는 위험하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종교적 정체성으로 환원하려는 “인간 정체성에 대한 고립주의적 접근”은 폭력을 부를 위험이 크다며, 인간 정체성의 다원성·상호의존성에 대한 명료한 이해로 지구적 시민사회를 작동시키자고 호소한다(·바이북스).
빈라덴이 사라진 세상은 평화로워질까. 미국·유럽연합·중국·인도 등 거대 석유소비국들이 아랍의 독재자들과 석유와 독재 묵인을 맞바꾸는 ‘악마의 거래’를 지속하는 한 폭력의 악순환은 불가피하다. 중동·아랍은 그저 ‘원유 위에 떠 있는 땅’이 아니다. 관용, 젠더 친화적인 정치,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과 부의 공정한 분배, 투명한 거버넌스와 양질의 교육 따위를 바라는 사람들의 삶터다. 평화를 원한다면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미군이 아버지를 사살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는 빈라덴의 12살짜리 딸 사피아는 잔인한 운명을 박차고 ‘복수의 총과 칼’이 아니라 코란의 가르침대로 평화를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앗살라무 알라이쿰!(평화가 함께 하기를)
한겨레21 편집장 이제훈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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