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전직 육군 병장입니다. 위병소 밖을 나와보니 서른 문턱, 늦은 나이에 군입대를 한 서러움이야 이곳이 아니더라도 왕왕 접할 에피소드일 테니, 굳이 지면을 낭비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2008년 촛불시위를 보며, 정훈 교육 시간에 한 간부가 “우리 국민의 냄비 근성 때문에 저렇게 몰려나가 촛불시위를 하는 것이다. 쇠고기 수입이 뭐가 문제라고 저렇게 난리인지 모르겠다. 휴가 중에 절대로 근처도 가지 말라”고 말하자 병사들은 끄덕끄덕. “TV 뉴스는 KBS다. ‘국가가 운영하는 방송’이니, 그만큼 보증된 뉴스다. 전 병사는 KBS 뉴스를 시청할 것!” 병사들은 끄덕끄덕.
지난해 1월 용산의 화마를 보도하는 뉴스를 보며, 한 간부는 “지금은 저렇게 해야 할 때야. 국가가 바로 서야 하거든”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훌륭하다고 본다” “지난 정권들의 잘못된 역사관으로 교육받은 너희들이 잘못된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군에서 그것을 모두 털어버릴 수 있도록.” 쌍용자동차 파업을 전하는 뉴스를 보고서는 “강성노조가 문제야”,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두고는 “대통령이 자살을 하고… 너희도 자살할 테면 자살해봐. 자살하면 너희 손해지, 내 손해냐” 등.
간부들이 따로 정신교육을 통해 길들여진 것은 아닐 텐데, 어떻게 하나같이 이렇게 왜곡된 형태로 군인에게 정훈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하는지 궁금하던 차에 그들이 보는 신문이 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신기했습니다. 하나같이 를 구독하고, 에 근거해 말하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1등 신문의 힘’이 진정으로 무서웠습니다. 더욱 난감한 것은 이런 현실이 제가 전역한 한 부대만의 문제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군대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목에 힘 좀 들어간다 싶은 기관과 단체에서는 대부분 ‘1등 신문’의 힘이 발휘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1등 신문의 힘에 제가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읽을 만한 책 좀 추천해주십시오”라고 다가온 후임들 덕이었습니다.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가방끈 질질 끌며 군에 입대한 나를 10년 아래의 이등병이 볼 때는 신기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종종 세상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경험과 감수성의 차이 등으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후임이 많아서, 우선 만화책을 추천해줬습니다. 최규석의 이었죠. 이런 식으로 시작해 손석춘의 을 관통하고 나니 아이들 눈빛이 달라지고, 제가 전역할 쯤에는 우석훈·유시민·한홍구·신영복·리영희를 알게 되고 책을 돌려보며 감동적인 질문과 감정을 토로해왔습니다.
감동 하나.
“전화 통화하면서 친구한테 를 읽고 있다고 하니까 운동권이냐, 군대에서 그런 거 왜 읽느냐, 라고 합니다. 저는 친구한테 세상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전역 뒤 그런 친구들과 독서모임 같은 걸 해보고 싶습니다. 먼저 세상을 알게 된 사람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감동 둘.
“저는 한국 근현대사가 녹아든 게임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냥 게임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굴절된 우리 역사에 눈을 뜨게 하는 그런 게임 말입니다.”
예상치 못한 그 녀석들의 반응은 군에서 받은 정신교육으로 역사관에 왜곡이 생길 수 있겠다 싶은 제 생각이 기우였음을 보여줬습니다. ‘1등 신문’의 힘에 소극적인 대항이 이 정도 결과를 만들었으면 괜찮다고 만족하면서 전역을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새의 양쪽 날개를 갖추게 하는 힘. 그것은 언론이 바로 설 때 더욱 현실성이 높아지는 일임을 군에서 깨달았습니다. 군 생활 동안 잊고 있던,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의 회비 자동이체를 다시 신청했고, 을 구독 신청하면서 ‘아름다운 동행’ 신청도 했습니다. 군에서 인연을 맺었던 후임들이 차례차례 전역을 하면서 민언련 활동도 소개해주었습니다. 회원 증진에 약간 도움이 됐죠. 저는 당장 10년 전에 들었던 ‘언론학교’를 다시 한번 수강해야겠습니다. 세상 물정 몰랐던 제가 ‘사회적 감수성’을 가질 수 있었던 공간이 바로 민언련의 언론학교였습니다. 꽃피는 3월에 시작하는 언론학교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설레입니다.
<hr>해직 언론인과 진보적 출판인이 1984년 창립해 언론운동의 모태가 된 단체입니다. 대항 매체가 전무하던 시절 월간지 을 발간해 독재 권력을 고발하고 소외받는 민중들의 진실을 알렸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창간을 이끌었습니다. 이후 민언련은 언론인 단체에서 시민운동 단체로 전환해 시민언론 교육, 언론감시 활동, 언론 관련 제도 개선 등에 주력하게 됩니다. 특히 1991년부터 시작한 ‘언론학교’는 시민들의 뜨거운 참여로 72기를 맞았습니다. 언론학교는 시민과 함께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언론의 문제점을 찾아보고 대안을 모색해보는 자리입니다. 오는 3월23일부터 시작되는 언론학교에서는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 최문순 민주당 의원(전 문화방송 사장) 등과 함께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의 언론의 실체를 파헤쳐보려 합니다. 민언련이 이명박 정권의 ‘언론 장악’에 맞서 더 힘차게 일할 수 있으려면 시민 여러분의 더 많은 지지와 후원이 필요합니다. 함께해주실 거죠? 홈페이지 ccdm.or.kr, 문의 02-392-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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