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 소식 앞에서 ‘케이(K)-문학의 쾌거’ 따위를 운운하며 국뽕 타령을 하기보다는 그가 다뤄온 역사의 비극과 세계의 비참에 대해 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나에겐 일본의 반핵 단체인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피단협)의 노벨평화상 소식도 마찬가지의 의미로 다가온다.
노벨위원회는 “핵무기 없는 세상을 이루고, 핵무기는 결코 다시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증인들의 진술을 드러낸 공로”에 주목했다고 그 선정 배경을 밝혔다. 이어서 “오늘날 핵무기 사용에 대한 금기가 압박받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현재 진행 중인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이 가해지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이 시점, 핵무기가 가장 파괴적인 무기임을 상기해볼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핵 경쟁이 치열해지고 점차 그 위협의 긴장도가 높아지고 있는 지금, 그리고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미국과의 핵공유·핵반입을 검토하겠다고 나선 상황에서 스웨덴 한림원이 반핵 입장을 낸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메시지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피단협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의 생존자들이 결성한 민간단체로, 41개 도도부현(都道府県)의 원폭피해자단체가 소속된 전국 조직이다. 피단협이 1956년 출범했음을 보면, 피폭자들이 전국적으로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셈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전하고 연합군총사령부(GHQ)의 점령통치가 시작되면서 피폭 피해자는 그대로 방치됐다. GHQ가 피폭자에 대해 은폐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건 공식적인 인정이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GHQ가 “원폭의 실제 영향을 온전히 연구”한다는 목적 아래 치료 없는 피폭자 실태 조사를 진행했다는 점이다. 그렇게 GHQ의 원폭 피해자 정책은 “은폐 정책과 무(無)치료 정책”을 기조로 했다.(이지영, ‘일본 원폭피해자의 고통의 감정과 일본의 피해자 정체성’)
그저 실험체로 다뤄졌던 원폭 피해자가 사람으로서 그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건 GHQ의 통치가 끝나고 2년 뒤인 1954년 3월1일, 미국이 태평양 비키니환초에서 수소폭탄실험을 실행한 뒤였다. 근해에서 조업 중이던 제5후쿠류마루호의 선원 23명이 피폭되고 이후 한 명이 사망한다. 이른바 제3의 피폭이라 불리는 후쿠류마루호 피폭 사건이었다.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기억을 일본 사회로 불러왔고, 피폭자들의 증언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이 시기 결성된 피단협은 원폭 피해를 알리는 증언 활동을 바탕으로 반핵, 반전 운동을 펼쳐왔다. 원폭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지원과 구제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초국적으로 피해자들의 연대를 구축하고 세계무대에서 반핵 목소리를 높이는 등 평화운동을 이어왔다. 하지만 피단협의 의도와 달리 그들의 활동이 ‘피해국 일본’이라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기여한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서사와 이미지로만 이를 배우고 기억하는 포스트메모리 세대에 피단협의 증언은 일본의 피해자 정체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 총리 이시바 시게루가 핵공유를 말하는 동시에 피단협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축하할 수 있는 배경이다.
그러므로 노벨위원회가 “새로운 세대가 강력한 추모 문화와 지속적인 헌신을 통해 증인들의 경험과 메시지를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할 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일본 정부의 극우화, 전범국 정체성을 지우려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득세, 한국 뉴라이트의 부상, 한·미·일 공조체제의 성격 등을 고려할 때, 피단협의 노벨평화상 수상에는 반드시 국제 외교정치의 현실에 대한 주석이 붙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원자폭탄의 위험을 말하면서 원자력 발전의 위험에 대해서는 함구한다는 것 역시, 문제적이다.
대중문화의 장에서 원자폭탄과 전후 일본에 대해 생각하면 두 개의 아이콘이 떠오른다. 종이학과 아톰이다.
종이학은 피단협의 상징이다. 이는 피폭 희생자 사사키 사다코의 사연에서 비롯됐다.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될 당시 사다코는 세 살이었다. 폭파 지점으로부터 약 1.6㎞ 떨어진 곳에 살던 그는 폭파와 함께 창문 밖으로 튕겨 나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찰과상 외에는 큰 부상이 없었다. 사다코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건 그로부터 10년 뒤인 1955년이었다. 일본에서 피폭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때 사다코는 나고야의 고등학생에게서 종이학을 선물받고,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완쾌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와 가족은 생에의 염원을 담아 종이학을 접기 시작한다. 하지만 천 마리를 다 접기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후 사다코의 종이학은 반전, 반핵의 상징이 됐다. 2016년 일본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종이학을 접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씨 착한 과학의 아이” 아톰.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의 주인공인 그는 원자력으로 만들어진 10만 마력의 힘으로 지구의 평화를 지키면서 전후 일본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당시 일본 사회에는 피폭으로 희생당한 이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원자력을 평화를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작동하면서, 원자력을 통해 ‘깨끗한 미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국가적 사명이 공유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피폭의 기억과 원자력의 꿈”(야마모토 아키히로)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원자력 연구개발을 위한 예산을 의회에 제출하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피력하고, 일본을 원자력 선진국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이 후쿠류마루호 피폭사건 바로 다음날이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1960년대에 첫 삽을 뜬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가 1971년 첫 가동을 시작한 건 이 기획의 한 단계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2011년 원전 폭발이었다.
2011년 3월12일. 도호쿠 지방 대지진으로 시작된 자연재해는 정확하게 인재로 전환된다. 3월11일 쓰나미가 원전을 덮치고, 3월12일 오후 3시36분 1호기가 폭발한다. 3월14일 오전 11시1분 3호기가 폭발하고, 3월15일 오전 6시14분 4호기가 폭발했다. 이 인재에서 가장 이상한 것 중 하나는 이 원전들이 도후쿠에 전기를 공급하는 도호쿠전력이 아니라 도쿄전력 소속이라는 점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은 수도권 전력 공급을 담당하고 있었고, 그건 수도인 도쿄가 원전이 초래할 수 있는 여러 위험은 물론 원전사고의 리스크를 후쿠시마에 떠넘기고 있었다는 의미다.
어째서일까? 도쿄는 원자력 발전의 위험을 떠안기엔 너무 비싸고, 너무 중요하고, 너무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땅이기 때문이다.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도쿄 중심으로 인구 이동이 진행됐고 후쿠시마는 낙후된 지역으로 남겨져 있었다. 그렇게 축소되고 있던 지역에 원전 유치는 밝고 깨끗한 미래, 아톰과 함께하는 미래 국가라는 판타지를 직접 살아갈 기회였을 터다. 이 두 필요가 만나 원전 위험의 외주화로 이어졌다.
비판적 지성인 다카하시 데쓰야는 “원전은 희생의 시스템”이며 그곳에는 “희생하는 ‘자’와 희생당하는 ‘것’이 있다”고 지적한다. “희생시키는 자의 이익은 희생당하는 것의 희생 없이는 산출되지 못하고, 유지될 수도 없다. 이 희생은 통상 은폐돼 있거나 공동체의 ‘소중한 희생’으로 미화되고 정당화된다.” 하지만 이는 응당 그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이들이 책임을 방기하는 “무책임의 체계”(마루야마 마사오) 위에 서 있다. 세계의 비참은 많은 경우 희생의 시스템과 무책임의 체계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래서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이 인공지능(AI) 전문가들에게 갔다는 소식을 함께 곱씹게 된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후 전세계적으로 주춤했던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건 AI 테크놀로지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양의 전력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원자력발전소에 관심을 갖게 되고, 원전 관련 주가 주식시장의 주목을 끌고 있다. 노벨문학상만큼이나 많은 주석이 필요한 수상 소식들이다.
손희정 시사덕후
*손희정의 정치 리부트: 낡은 세계는 죽어가고 있지만 새로운 세계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시절, 구태를 뒤집는 새로운 정치를 보고 싶은 시사덕후의 시사 평론.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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