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2026년 6월6일 오전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앞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며 재선거를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2026년 지방선거 결과는 절묘하다. 더불어민주당은 “선거에서는 승리했지만 정치적으로는 패배했다”는 평가를 피하기 힘들고, 국민의힘은 숨 쉴 구멍만 겨우 뚫었다. 내란에 책임이 있는 제1야당은 심판하되, 정치를 잘한다고 보기 어려운 거대 여당에는 경고를 주는 성적표였다.
상황이 이렇다면 양당에서 누군가는 책임을 통감하고 나섰어야 한다. 하지만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큰 승리” 운운하며 면피 중이고,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의 자유”를 외치며 찾아 헤매던 ‘자기 자리’를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에서 찾은 참이다. 정 대표는 전당대회를 둘러싸고 벌어질 ‘내전’ 앞에서 실책을 인정할 수 없을 테고, 장 대표는 오세훈·한동훈 등 꼴 보기 싫은 당선자들 사이에서 ‘못 먹어도 고’라도 외쳐보겠다는 심산일 터다.
양당 대표의 기이한 초식(예상 가능한 뻔한 행동을 일컬음)은 한국 대의제 민주주의가 대면한 곤란한 현실을 폭로한다. 정치인들이 대의(大義)를 대의(代議)하기를 기꺼이 포기하고 ‘ABC론’이나 ‘부정선거론’처럼 자기들만의 세계관에 갇혀 팬덤 정치에 정주하고 있을 때, 유독 국민만이 탈정치화됐다고 손가락질당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선거 직후 ‘잠실 광장’(이후 잠실)이 열렸다. 국민의힘의 위악적인 무능과 민주당의 위선적인 무능이 만난 자리에서 열린 정치 공백을 확인하면서, 시민들은 ‘대의’가 아닌 ‘직접’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잠실에서 ‘부정선거/윤 어게인’을 외치는 이들조차 국민의힘 지지자로 수렴되지 않는다.
이건 흥미로운 일이다. 자신을 대의할 이를 뽑는 투표권의 정당한 행사를 위해 싸우는 이들이 어째서 정당정치의 당파성을 부정하는가? 왜 ‘대변자’의 등장에 경기를 일으키고 (‘투표용지 부족사태 대응’ 단톡방 공지사항에 등록된 표현을 빌리자면) “오직 ‘순수’한 시민”임을 자처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선 잠실이 어떤 공간인지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잠실은 선거관리위원회의 부실 행정으로 투표권을 침해당한 유권자가 ‘공정한 참정권’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집결하면서 열렸다.
초기 잠실에는 여러 입장이 얽혀 있었다. ‘차라리 이렇게 나눠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해’라는 제목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된 한 장의 이미지는 초창기 잠실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핸드볼경기장 주변을 ‘재선거 ZONE(Only 재선거, 성조기 불가능)’ ‘부정선거 ZONE(성조기 가능, 윤 어게인 가능)’ ‘유튜버 방송 ZONE(자유로운 방송 및 인터뷰 가능)’, 그리고 ‘기타 ZONE(퀴어, 대진연(대학생진보연합), 전교조, 이준석, 집회 목적과 무관한 단체 및 정치 활동 구역)’으로 나눈 구획도였다. 물론 ‘기타 ZONE’의 설정은 ‘순수’ 시민의 인식론이 정확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지만, 어쨌거나 잠실은 ‘뭐든 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열린 광장’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광장은 극우 성향의 시민들로 재편됐다. 초창기 마이크와 스피커 사용 금지, 성조기 금지 등 극우 개신교의 정치 선동을 차단하기 위해 취했던 여러 조치 때문에 광장을 쉽게 점유하지 못했던 극우들은 곧 정치적 중립을 외치는 시민들을 “대진연 프락치”로 몰아갔다. 놀라운 전술이었다. 누군가에게 “순수하지 않다”는 낙인을 찍음으로써 ‘순수하지 않은’ 이들이 광장의 주도권을 찬탈한 것이다.
싸움이 벌어지고 몸수색하는 등 광장이 폭력성을 띠면서 “평화로운 시위”를 기대했던 시민들이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건전한 광장을 꾸리려던 초창기 (평범한 ‘엄마’임을 강조하거나 ‘누나’라 불렸던) 멤버들은 생활인으로 돌아가야 하는 물리적 한계와 더불어 ‘순수의 역설’에 빠졌다. ‘투표용지 부족사태 대응’ 단톡방에서 대화와 토론을 금지하고, 현장에서는 공중도덕 준수로 스스로의 순수함과 시민됨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역량은 함양됐다기보다는 오히려 위축됐다.
극우의 잠실 장악은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지만, 일정 정도 예정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개표소가 있는 핸드볼경기장에서 투표함 봉쇄 광장이 열렸던 바탕에는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해온 극우 블록의 축적된 내공이 놓여 있었다. 실시간 유튜브 중계 시스템, 각종 정보와 ‘가짜뉴스’가 함께 퍼지는 온라인 홍보망, 현장을 움직이는 구호 선창과 투표함 봉쇄 전술 등은 극우의 인프라였다. 여기에 극우적 세계관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SNS 인플루언서들이 ‘인증샷’ 형식으로 참여하며, 온·오프라인에서 집회 분위기를 이끌었다.
이에 더해 왜 지금 그토록 선거관리위원회의 무능에 대한 분노가 단시간에 뜨겁게 불타올랐는가는 질문해볼 만하다. 재선거 요구에 담긴 정치적 열망은 정당하지만, 한편에 한국 사회에 공기처럼 공유되는 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놓여 있고, 이는 극우의 ‘스톱 더 스틸’(도둑맞은 선거를 멈추라) 세계관이 그려놓은 어떤 풍광을 빼고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앞으로 ‘순수’한 시민들이 극우에 대항하는 역공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극우는 조직력을 가졌고 ‘순수’한 시민들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열렸던 여러 광장에서 그야말로 시대정신이 된 ‘순수’가 끝내 정치화되고, 그 목소리가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역량을 가진 조직들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응원봉 광장 역시 1700여 개 진보 단체들의 연합인 ‘윤석열퇴진·사회대개혁비상행동’ 등이 집회 인프라를 제공하고 현장을 운영한 덕분에 지속 가능했다. 물론 이것이 광장의 시민을 그 단체들 뜻대로 조직할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광장에 어떤 인프라가 깔리는가는, 그 광장의 성격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6·3 지방선거 본투표일에 투표용지 부족으로 투표 시간이 밤 10시까지 연장됐던 서울 송파구 잠실7동 제2투표소 앞에 2026년 6월4일 오전 투표함 반출을 반대하는 시민들이 모여 있다. 한겨레 최현수 기자 emd@hani.co.kr
이제 ‘순수’한 시민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이토록 ‘정치 이전의 시민성’을 강조하는 집단적 행동은 낯선 광경이 아니다. 2016년 촛불광장의 시작을 알렸던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반대 시위의 현장에서 우리는 기성 정치의 매개를 거부하며 스마트폰을 통해 수평적으로 소통하고 행동하는 ‘다중’의 출현을 목격했다. 최근에는 삼성 초기업노조가 “정치·이념 투쟁 아닌 실리”를 내세우면서 “노동운동의 변곡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들은 말하자면 ‘3세대 개인주의자’이다.
3세대 개인주의자는 ‘보편적 개인화’를 목표로 삼으면서 민족 정체성 안에서 스스로를 ‘국민’으로 통합시켰던 1세대 개인주의나 68혁명 이후 ‘보편적 국민’이라는 환상이 배제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젠더, 인종, 신체조건 등 다양한 정체성 정치를 추구했던 2세대 개인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개인’을 주장한다. 그들은 1세대, 2세대와 달리 집단 정체성의 지표로 분류되기를 거부하고 ‘개별적인 자아 정체성’을 추구한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온전히 대표하고자 하는 ‘개별자 주체’인 것이다.(이정은, ‘왜 극우포퓰리즘이 득세할까?–개인주의 변천사와 관련하여’, 2023)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와 함께 도래한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고립무원의 생존주의를 내면화하면서 등장한 3세대 개인주의자들은 웹2.0 시대의 디지털 미디어와 조립되면서 매개와 대의가 아닌 ‘직접 재현’의 감각을 익혔고, 이제 웹3.0의 세계관, 즉 ‘신뢰 없는 직접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도파민이 터지는 일이지만, 동시에 불안하고 또 피곤한 일이다. 스스로를 직접 재현하기 위해서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인 주목 경쟁에서 끝내 이겨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의제’라는 형식을 따라야만 하는 현실에서, 3세대 개인주의자는 예민한 소비자 혹은 팬덤으로서 정치인과 만난다. 이들은 다른 단위들을 통해 매개되는 것을 의심스러워하거나 불편하게 여기고, 자신들의 ‘대표’와 직접 소통하기를 원한다. SNS의 메시지 정치가 점점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3세대 개인주의와 뉴미디어의 상호작용 안에서다. 그리고 이 3세대는 특정 세대나 젠더에만 국한된 설명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3세대’의 특징을 공유한다.
문제는 3세대 개인주의가 극우 포퓰리즘과 쉽게 만난다는 점이다. “부패한 기득권”에 저항하면서 “나만이 순수한 국민인 당신을 대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정치인은 3세대 개인주의와의 친연성, 그리고 그렇게 형성되는 친밀함 안에서 영향력을 쌓아간다.
그렇다고 해도 3세대 개인주의자의 정치적 경로가 확정돼 있는 것은 아니다. 미래라이프 투쟁이 오직 ‘이대 특권’을 지키고자 했던 공정주의자들의 탈정치적 집회라고 폄훼되기도 했지만, 그 안에 모여들었던 의지는 하나의 레이어로 압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집회를 통해 각성한 주체들은 이후 각자의 길로 분화되었으므로, 그 폭발적인 현장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후에 만들어진 경로들일 것이다.
“상식이 무너졌다”는 생각에 잠실로 향했던 시민들은 광장이 극우화되면서 모일 자리를 잃었다. 한국 사회에 주어진 과제는 부정선거와 부실선거의 혼란 속에서 가르마를 잘 타는 일이다. 정치권이 시민들의 목소리에 응답하고 부실선거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책임을 묻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이 공유한 공정의 감각을 ‘과정으로서 민주주의’로 조직해 들어오는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구체적 대안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결선투표제 도입이다. 6만 표, 그러니까 1.15%포인트 차이로 서울시장이 결정되는 시스템으로는 민의를 제대로 대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정선거라는 조작된 공포를 막을 수도 없다.
무능한 정당정치로 인해 텅 비어버린 대의제에 포퓰리즘이 아닌 다른 정치적 효능감을 채워 넣을 방법을 찾아보자.
손희정 시사덕후·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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