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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말에 안도해야 하는 아이러니, “내가 보수였나?”

기만적 질서를 깨는 ‘비폭력’과 대비되는 극우의 폭력…‘만물의 사법화’ 넘고 혐오·배제 타파하려면
등록 2025-04-10 19:53 수정 2025-04-14 17:58
대통령 윤석열 등 내란죄 피의자들의 방어권 보장 권고 등을 담은 안건이 국가인권위원회 2차 전원위원회에 상정된 2025년 2월10일 오후 서울 중구 인권위 건물 1층에서 윤석열 지지자들이 ‘윤 대통령 인권 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김영원 기자

대통령 윤석열 등 내란죄 피의자들의 방어권 보장 권고 등을 담은 안건이 국가인권위원회 2차 전원위원회에 상정된 2025년 2월10일 오후 서울 중구 인권위 건물 1층에서 윤석열 지지자들이 ‘윤 대통령 인권 보장’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김영원 기자


“그건 국민과 역사와 그리고 헌법에 대한 모독이죠.”

보수 언론인 조갑제가 윤석열 탄핵 선고 후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국민의힘의 향방을 묻는 진행자에게 “국민 배반자로 파면된 사람,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과 함께해서는 안 된다고 답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실로 보수주의자다운 발언이고 듣는 이로 하여금 묘한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인터뷰였다.

이번 탄핵 정국을 겪으면서 나는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선고가 늦어지고 온갖 ‘썰’이 난무하는 가운데, 윤석열과 국민의힘은 끊임없이 법과 제도를 모욕했다. 속이 터질 것 같은 광경 앞에서, 나는 종종 “제발 법대로 하란 말이다!”를 외쳤다. 그러다 문득 “내가 보수였던가?” 싶어지고 말았다.

 

극우·보수가 흔드는 ‘질서’

여기서 나는 ‘보수’라는 말을 엄밀한 개념 규정에 따라 사용하고 있진 않다. 그저 대통령과 국회의원이란 작자들이 법치주의를 사뿐히 지르밟고 헌정 질서를 유린하는 걸 보면서 “법대로!”를 외치고 법률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상식’에 의존하려 했던 내 모습이 기존 질서를 옹호하고 이미 구축된 지식체계의 보존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의 태도와 닮았다고 느꼈다.

한편으로,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에서는 2016년 촛불광장에서 품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집회 참가자들이 보여준 ‘질서 의식’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경찰 버스에 스티커를 붙이는 투쟁 뒤 스스로 스티커를 제거하는 걸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기라면 무릇 ‘무질서’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 않나 싶었다. 게다가 당시 경찰청장은 경찰 버스를 밧줄로 묶거나 올라타는 등의 “폭력적인 행위”와 비교했을 때 “스티커를 붙여주는 쪽이 더 낫다”고 말했다. 경찰이 선호하는 투쟁이라니, 조금 난감했다. 그런데 서울서부지법에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폭도들을 보고 질서는 중요하다 싶었다. “싹 다 잡아들여라.” 이렇게 중얼거리다 또 생각했다. “나는 역시 보수였나.”

물론 “내가 보수인가?”라는 질문은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자조적인 농담이다. 보수건 진보건, 폭력은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서울서부지법에서의 폭력은 진보적인 직접행동의 비폭력 투쟁의 의의를 되새기게 하는 계기였다. 비폭력 투쟁은 ‘평화를 깨는 행위’와 ‘폭력’을 구분한다. 이때 ‘평화를 깬다’는 건 힘을 가진 자들의 관점에서 유지되는 거짓 평온과 그 위에 세워진 기만적인 질서를 흔들어 평화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역동적인 행위다. 그것은 폭력이 아닌 다양한 방식의 저항과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컨대 남태령의 투쟁은 평화롭지 않았다. 그것은 비폭력적이었다.

그러므로 농담을 걷어내고 말하자면, 내가 2016년 당시 촛불광장의 ‘질서 의식’에 대해 가졌던 진짜 질문은 이것이었다. 공권력에는 유순한 시민들이 왜 페미니스트에게는 그토록 거칠게 구는 것일까? 경찰차에 붙인 스티커는 친히 떼어줄 정도로 친절한 마음이 광장에 등장한 소수자의 목소리에는 어째서 그토록 냉정했을까.

‘나는 보수’ 농담이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이 보수이고 무엇이 진보인가 하는 것이다. 대중은 이제 ‘극우’와 보수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은 그 구분에 실패하고 있지만 말이다. 스스로 진보라 자처했던 더불어민주당이 중도 우파라고 선언하는 와중에, 오히려 극우가 기존 질서를 흔들어 급진적인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의 자리를 노린다.

 

‘대안’·‘대첩’… 진보의 언어 점거한 ‘보수’

2010년대 초, 한국의 넷우익이라 불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들은 스스로를 주류 사회나 기존의 정치 세력 등 기득권과 대별되는 ‘급진적 소수’(정확하게 말하자면 ‘극단적 소수’)로 위치 짓고자 했다. 당시 온라인 문화의 주류가 ‘안티 조선일보 운동’ 등으로 대변되는 진보로 보였기 때문에, 그에 저항하는 자신들이 급진적인 대안 세력이라고 생각했던 셈이다. 그런 ‘일베식 세계관’이 지금 한국 극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대안우파’(Alt-right)의 뿌리다. 스스로를 소수자이자 약자라고 생각하는 한국 남성은 그렇게 탄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안우파는 우파, 즉 보수의 대안이 아니다. 대안우파는 진보에 대한 대안이었다.

이는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전 지구적으로 극우 포퓰리즘이 힘을 얻는 이유다. 도널드 트럼프 같은 극우 포퓰리스트들은 다음과 같은 로직을 구사하며 부상했다. “우리의 고통은 기존 시스템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진보, 즉 기득권 진보 세력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을 치자.” 그렇게 시엔엔(CNN) 같은 언론은 ‘클린턴 뉴스 네트워크’로 조롱당했다. 이런 세계관 안에서 이제 진보가 우파다. 그리고 이런 논리가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다. 진보 정치 역시 역사와 힘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한때 보수는 ‘현재’를 ‘과거의 결과’라고 믿고 진보는 ‘미래의 시작’이라고 믿었지만, 이제 진보도 과거가, 역사가 중요하다. 역사의 부정은 쉬이 극우적 반지성주의로 흐르기도 한다.

대안우파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골치 아픈 현실은 정치적 입장에 따른 언어 사용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언한 마거릿 대처의 TINA(There Is No Alternative, 대안은 없다)와 이를 맞받아치는 SITA(Socialism Is The Alternative, 대안은 사회주의다)에서 드러나듯이 ‘대안’은 체제 전환을 꿈꾸는 진보의 언어였다. 하지만 더 이상 이런 구분은 유효하지 않다.

말 자체로는 중립적이지만, 내란 사태에서 진보의 말이 도둑질당한 느낌을 받았던 경우 중 하나는 ‘대첩’이었다. 탄핵에 찬성한 이들에게 ‘남태령 대첩’이 있었다면, 탄핵 반대를 주장하는 극우에는 ‘인권위 대첩’이 있었다. 이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윤석열의 방어권을 인정하라는 권고를 발표한 날을 지칭한다. 그날 인권위 로비를 점거한 극우들은 “윤석열!”을 연호하며 인권위 대첩의 승리를 자축했다.

나는 이 ‘대첩’과 저 ‘대첩’이 동음이의어일 뿐 서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발음이 같은 단어들의 혼재 속에서 그 의미를 분리하고 다르게 평가하여, 그 차이를 설득하는 일의 곤란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단식은 또 어떤가? 찬탄, 반탄, 양쪽에서 단식을 했다. 이 단식과 저 단식이 다르다는 평가가 설득력을 가지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대화가 필요하겠는가.

 

‘판사 입’ 쳐다보는 시간 줄여나가야

“당신도 옳고, 저 사람도 옳다”는 식의 상대주의적 접근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상대주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마치 동등한 힘과 권리를 누리는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더 파워가 큰 쪽의 폭력을 용인하고, 그들에게 헤게모니를 부여하는 데 기여하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옳은지 끝까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공통의 언어를 만들고, 동음이의어의 혼란을 줄여나가야 한다.

이런 와중에 한덕수 권한대행이 또다시 헌법을 위반하고 상식을 비웃으며 헌법재판관을 임명했다. 정치권에서는 이에 대해 ‘8인 전원 일치로 탄핵을 선고한 후’ 헌재가 정치적으로 최대치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조기 대선을 치르고 민주당이 거대 여당이 되면, 국민의힘으로서는 민주당을 견제할 방법이 헌재를 통한 제어뿐이라는 말이다. 이는 이미 시작된 ‘가처분 정치’의 격화를 예고하는 평가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들이 2025년 3월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십자각 인근에서 대통령 윤석열 탄핵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회원들이 2025년 3월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십자각 인근에서 대통령 윤석열 탄핵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혼란의 바탕에는 사회의 제 문제가 오로지 법정에서만 해결되는 ‘만물의 사법화’가 놓여 있다. 갈등을 법이라는 단일한 언어, 단일한 틀 안에서 해결하려는 시도가 협의와 숙고, 공론이라는 정치적 언어를 무용하게 만들었다. 언어의 종 다양성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법조계 전반은 그런 무게를 짊어질 정도로 단단하지도 못할뿐더러 국민적 신뢰를 축적하지도 못했다. 가능하면 헌법재판관들의 입만 쳐다봐야 하는 답답한 시간은 줄여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법의 언어 외부에서 사회적·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는 일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시험대로 개헌과 차별금지법 제정, 두 개의 논의가 대두되고 있다. 전자가 더 큰 주목을 끌고 있지만, 극우를 키우는 자양분이 된 혐오와 배제의 문제를 사회적 합의와 공통의 언어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기 위해 후자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 정치 질서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응원봉 광장에서 비폭력적 직접행동에 나섰던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포용하려는 의지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이 구체화할 ‘사회적 포용’

차별금지법은 단지 소수자를 위한 법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상대주의를 견제하고,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에 대한 합의의 틀을 세우는 시작이다. “법대로!”라는 외침이 ‘보수의 언어’가 아니라 상식의 언어, 민주주의의 언어가 되는 것도 결국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일 것이다.

 

손희정 시사덕후·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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