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동해선·경의선 도로를 기어이 폭파한 날, 통일이 되면 찾아보라며 해주은행 적금통장을 물려준 내 할머니의 간절함과 흐릿한 월 납입액 숫자에 담긴 젊은 할아버지의 애틋함이 일거에 사라졌다. 소떼를 몰고 간 정주영의 망향과 평양 순안공항을 내달리듯 걷던 디제이의 환한 미소도 지워졌다. 통신도 철도도 도로도 그 밖의 모든 연결 수단도 이제 없다. 폭파 소음은 지나치게 컸고 대응 사격은 의미 없이 위험했으나, ‘오빠 카톡’으로 시끄러운 온 나라는 이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이 모든 소음과 상실에서 가장 먼 곳에 있었다. 2024년 10월15일 대통령은 제주에서 열린 민생토론회에서 “정책 소통으로 협치를 보여주며 박수를 무려 15번이나 받았다.” 일부 언론은 대통령실의 발표를 보란 듯이 베낀 기사로 대통령의 자기만족적 행보와 자화자찬을 기록했다. 통치자가 무서울 때가 아니라 우스울 때 나라에 망조가 든다는데, 급기야 가여워 보이면 이는 어떤 단계일까.
통치 불능이면서 통치하는 척한다. 두서 없이 던져놓은 정책들은 표류하고 이해관계자들은 큰 고통을 겪고 있는데 마치 아무 일 없는 척한다. 참모들은 고사하고 ‘사랑하는’ 아내와도 소통을 못하면서 여기저기 다니며 장밋빛 지원을 약속한 걸 두고 민생을 돌보는 소통과 협치의 실현이라니. 이런 우스꽝스러운 엇박자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누적된 결과만도 아니라, 애초에 본질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시간이 가도 바뀌지 않는다. 나아지지 않는다. 명태균이 뻥쟁이라면 대통령은 통치의 기본기를 전혀 갖추지 못한 허풍쟁이, 그게 정체다.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 달려와 생업과 일상의 평화를 호소한 접경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이러다 무슨 일 나는 거 아닌가 뒤숭숭해하며 사태를 주시하는 마당에 군 최고 통수권자라는 이가 일언반구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는 기색이다. 긴장 완화를 위한 방안은 고사하고 당장의 불안을 달래주는 제스처조차 없다. 국방 당국은 ‘즉강끝(즉각·강력히·끝까지) 응징’만 반복한다. 북한이 발끈하고 나선 평양 상공 무인기에 대해 국방부 장관은 “우리가 그런 적 없다”더니 “사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없다”고 말을 바꾸고, 국가안보실장은 “우리 내부 문제” 운운하며 “북한 주장에 일일이 대응하는 게 현명하지 않다”고 했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더니, 책임 있게 상황을 관리하려는 의지와 계획은 전혀 읽히지 않는다. 다들 대통령 ‘입맛’만 관리하는 듯하다. 대통령은 북한 무인기의 서울 상공 침입 당시 무분별하게 ‘확전’을 입에 올려 국민을 놀라게 한 바 있다.
대통령이 자신의 통치 불능을 감추기 위해 남북의 군사적 위기를 이용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마저 번진다. 오죽하면 김건희·윤석열 부부와 ‘안전 이별’을 도모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까.
누가 봐도 정권이 휘청이고 있다. 하루가 멀게 터져나오는 김건희 여사 관련 폭로에 집권 세력은 자중지란에 빠졌다. 거짓말조차 제대로 못할 정도로 속수무책이다. 대통령실은 횡설수설이고, 여사는 숨었다. 대통령은 혼이 나가 보인다. 발 빠른 기업들은 한덕수 국무총리에 대한 조사와 탐문에 들어갔다고 한다. 여차하면 권한 대행을 할 사람이라서 그런단다. 이런 소동과 혼란, 국민 에너지와 국력의 낭비를 끝낼 수는 없을까? 대통령이 여사와 헤어지거나 스스로 물러나는 방법 말고 무슨 길이 또 있을까.
김소희 칼럼니스트
*김소희의 정치의 품격: ‘격조 높은’ 정치·정치인 관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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