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착각에 빠져 있다. 자신이 어떤 대의 위에 굳건히 서 있다는 착각이다. 그가 말하고 보수언론이 상품화한 2022년 대통령선거의 대의는 ‘공정’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윤 대통령이 특수부 검사로서만 공정 이미지를 쌓았다는 점이다. 누구든 문제가 있으면 수사한다는 법 형식주의에 기반한 이 공정은 윤 대통령이 대권을 잡은 뒤 곧바로 무너졌다.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에 대한 검찰의 미진한 수사가 붕괴의 근간이 됐고, 해병대 채수근 상병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한 ‘런종섭’ 사태는 붕괴를 입증해줬다.
다른 하나는 공정 자체의 한계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논란과 2019년 조국 사태, 2020년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사태 등을 통해 확산한 공정 담론에는 애초부터 사회가 없다. 정치평론가 김민하의 저서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의 생각을 빌리면, 여기서 공정은 나의 능력으로 경쟁해서 정당하게 얻은 ‘나의 이익’을 훼손하는 정치(인)에 대한 반발이다. 동시에 사회를 더 낫게 만들기 위한 정치 혹은 같은 경쟁 선상에 설 수 없는 경제적·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나의 손해’를 의미한다. 이해관계에 기반한 이런 지지층은 윤 대통령의 정치가 ‘나의 이익’과 어긋나면 바로 고개를 돌린다. 침체된 경제와 치솟는 물가에서 드러난 윤 대통령의 무능이 중도층을 넘어 지지층 이탈까지 이끌어낸 까닭이다.
문제는 착각에 빠진 권력에 대한 심판 정치의 뒤안길에 커다란 상흔이 남았다는 점이다. 모두가 무도하고 무능한 정권 심판에 매달리다보니 무엇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제22대 총선에서 자리잡을 곳이 없었다. 이런 구도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은 심판의 언어를 두고 선명성을 경쟁하며 다수 의석을 분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독자적 진보정당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입성 이후 20년 만에 원외로 밀려났다.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어렵게 싹을 틔운 진보정당 운동이 하나의 시대를 끝낸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시대란 단순히 진보정당의 것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에서 나온 부유세와 같은 경제민주화 정책, 무상의료·무상교육과 같은 복지국가 정책 담론이 민주당과 국민의힘이라는 거대 양당 세력에 흡수되면서 주류 담론을 다투던 시대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전성기는 무상급식의 물꼬를 튼 2010년 지방선거를 거쳐 보수정당마저 복지를 말할 수밖에 없던 2012년의 국회의원선거와 대통령선거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한국 정치에서는 아무도 그런 정책을 두고 다투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적폐라고 부르며 심판하는 정치만 남았다.
“한국 사회의 높은 자살률과 낮은 합계출생률, 고령화, 연금 문제 등 중요한 이슈들은 모두 제쳐두고 거대 양당들은 상대방이 안 된다는 메시지를 냈을 뿐이었다. 언론이 정당들의 승패를 말하고, 국민이 이겼다고도 하던데 모두가 패배한 것 같다.” 청년정치 에이전시 뉴웨이즈의 박혜민 대표가 이번호 특집 ‘이것이 민심, 제22대 총선 결과’에서 한 말이다. 5월30일 임기를 시작하는 제22대 국회는 이런 우려를 극복해낼 수 있을까.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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