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총선에 이어 제22대 총선에서도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나란히 위성정당을 창당하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를 무너뜨리고 있다. 여기엔 스스로 만든 선거제도를 무력화한 민주당의 책임도 있지만, 정치 개혁을 외면한 채 아무 거리낌 없이 위성정당을 만들어온 국민의힘의 책임이 가장 크다. 국민의힘은 선거제도 개편 등 정치 개혁이 실현될 수 있었던 주요 국면마다 당리당략을 바탕으로 훼방 놓기를 일삼아왔다는 비판을 받는다.
2024년 1월16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국회의원 수를 300명에서 250명으로 줄이는 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제일 먼저 통과시키겠다”고 발언한 것은 국민의힘이 정치 개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한 위원장의 ‘의석수 축소’ 주장은 정치혐오에 기댄 퇴행적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2월13일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조국씨가 뒷문으로 우회해 (국회의원) 배지를 달 수 있는 제도”라고 비판하며 병립형 비례대표제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선거제도 개혁을 막기 위한 국민의힘의 ‘노력’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만큼 오래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첫해인 2003년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중대선거구제 또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선거제도 개혁이 거의 처음으로 정치권 이슈로 부상하게 된 계기였다. 그러나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은 이를 ‘영남에서까지 의석수를 확보하려는 대통령의 정치적 노림수’로 깎아내렸다.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지역민의 의사를 직접 반영하는 소선구제도가 옳다”며 반대했다. 노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2년 뒤 선거제도 개혁을 전제로 한 대연정을 제안하며 다시 한번 승부수를 띄웠다.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더불어민주당 전신)이 아닌, “한나라당이 주도하는” 파격적인 대연정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때도 한나라당은 “응대할 가치도 못 느낀다”(이정현 당시 한나라당 부대변인)며 제안을 일축했다.
이후 잠잠하던 선거제 개혁 이슈는 2015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안을 내놓으면서 재부상했다. 당시 선관위 안은 전체 의석수를 300석으로 유지하되 지역구 의석수는 200석으로 줄이고 비례대표 의석수는 100석으로 늘리자는 내용이었다. 선관위는 정치권의 이해관계에서 한발 떨어진 기관이라는 점에서 ‘중립적인’ 방안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이때도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은 선관위 안에 반대하며 오히려 비례대표 의석수를 기존(당시 54석)보다 더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병근 조선대 교수는 “영남을 포함해 지역구 의석수가 줄어든다는 것에 현역 의원들의 반발이 심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논란 끝에 여야는 기존 병립형 비례대표제를 유지한 채 비례대표 의석수를 오히려 7석 줄이는 ‘정치 개악’에 합의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제 개혁에 대한 합의문까지 발표하고도 ‘먹튀’를 한 사례도 있었다. 2018년 12월15일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을 포함한 여야 5개 정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방안 검토’와 ‘의원 정수 확대 논의’ 등을 담은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는 당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이정미 당시 정의당 대표가 선거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열흘 동안 단식한 끝에 성사된 것이었다. 그러나 합의 이후 자유한국당은 해당 논의 기구에 참여하지 않았고 오히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과 의원 정수 확대에 강하게 반발하는 등 합의문의 방향과 정반대 행보를 보였다.
문제는 자유한국당이 반대만 할 뿐 자체적인 선거제도 개혁 방안은 내놓지 않은 채 ‘시간 끌기’만 했다는 점이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국민의힘이 선거제도 개혁 논의를 할 때 주로 써온 사보타주(태업) 방법은 ‘결정하지 않기’였다”며 “지난 정개특위(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도 선거제도 관련 논의를 할 때면 ‘내부의 진지한 논의를 거쳐 의총을 통해 결정하겠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논의를 계속 지연시켜왔다”고 지적했다.
자유한국당은 2019년 3월10일에야 자체 안을 내놨다. 이날은 함께 합의문을 발표한 나머지 여야 4당이 자유한국당에 자체 개편안을 내라고 요구한 최종 시한이었다. 그러나 이날 자유한국당이 내놓은 안은 기존 합의안을 뒤집는 내용이었다.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폐지하는 것을 전세계 선진국들이 시행하고 있다”며 “(전체) 국회의원 수를 조정해서 10% 줄이는 270석을 제안하는 것이 우리의 안”이라고 밝혔다. 비례대표 의석(당시 47석)을 완전히 없애고 270석을 모두 지역구 의석으로 채우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그해 4월30일 벌어질 ‘동물국회’의 서막이었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협의체는 논의 끝에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하기로 했다. 패스트트랙에 띄우기로 한 날인 4월29일이 되자 국회엔 긴장감이 흘렀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정개특위 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스크럼을 짜고 복도에 드러누워 “독재 타도” “헌법 수호”를 외치며 반대에 나섰다. 애초 열리기로 예정됐던 회의실을 급하게 바꾼 뒤 밤 10시50분에야 회의가 시작되는 등 자유한국당의 방해 공작은 끈질겼다. 결국 다음날 0시30분이 돼서야 패스트트랙안이 통과됐다. 이후에도 자유한국당은 장외투쟁과 단식농성 등으로 법안 통과를 저지하려 했지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결국 2019년 12월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167명 가운데 찬성 156명으로 가결됐다.
이후 자유한국당은 공언해온 대로 위성정당 창당 작업에 착수했다. 2020년 2월5일 한선교 의원을 당대표로 한 비례대표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이 창당됐다. 뒤이어 더불어민주당도 ‘현실론’을 들어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을 창당하며 선거제도 개혁의 취지를 훼손하는 행보에 동참했다. 두 정당은 의석수순으로 결정되는 정당 기호의 앞번호를 차지하기 위해 위성정당에 ‘의원 꿔주기’라는 꼼수까지 쓰며 정치권 안팎의 비판을 자초했다. 김형철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교수는 “정당은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인데 가짜 정당을 만들어 의원 꿔주기까지 한다는 건 정당정치를 희화화하는 것”이라며 “이런 행태는 국민을 혼란케 하고 민심을 왜곡한다”고 꼬집었다.
2020년 총선 이후 양당은 위성정당에 대한 문제의식을 잠시 공유하는 듯했다. 2021년 7월 이준석 당시 국민의힘 대표와 송영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위성정당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에 나설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구성된 정개특위는 위성정당 방지 등 선거법 개정을 논의 대상에서 제외하며 두 대표의 약속을 무색하게 했다. 각 정당의 정치적 유불리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선거제도를 논의할 수 없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거대 양당의 ‘짬짜미’라는 비판이 나왔다.
선거제도 개혁의 또 다른 기회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나왔다. 윤 대통령은 2023년 1월2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치 양극화 현상을 지적하며 “중대선거구제를 통해서 대표성이 좀더 강화되는 방안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의 인터뷰를 계기로 어느 때보다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여야 의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 달 뒤에는 여야 의원 130여 명이 뭉친 ‘초당적 정치개혁모임’이 출범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후 김진표 국회의장이 선거제도 개혁을 논의하기 위한 국회 전원위원회를 개최하자고 제안하면서 정치 개혁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당시 국회 정개특위가 전원위원회에 올리기 위해 마련한 선거제도 개편안은 세 가지였다. 1안은 소선거구제+권역별·병립형 비례대표제, 2안은 소선거구제+권역별·준연동형 비례대표제, 3안은 도농복합형 중대선거구제+권역별·병립형 비례대표제다. 1안과 2안은 의원 정수가 현재 300명에서 350명으로 늘어나는 안이었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전원위원회가 시작되기 직전 또다시 ‘재 뿌리기’에 나섰다. 2023년 4월6일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총 의석수 30석 감축’ 주장을 들고나오면서 의석수 확대를 기반으로 한 전원위원회 논의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이후 열린 전원위원회(4월10~13일)에서는 여야 의원들이 각자의 주장만 펼치면서 국회 차원의 단일안 만들기에 실패했다. 일부 국민의힘 의원은 ‘의원 정수 확대 반대’ ‘비례대표제 폐지’ 등을 주장하며 전원위에 올라온 선거제 개편안을 무력화했다. 한 달 뒤엔 400~500여 명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선거제 개혁 국민공론조사가 실시됐지만, 이때도 국민의힘은 국민 여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민공론조사는 ‘비례대표를 더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69.5%로 나오는 등 선거제 개혁에 한발 다가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김기현 대표의 의원 정수 축소 주장을 이미 당론으로 정한 국민의힘은 공론조사가 ‘편향된 것 아니냐’며 성과를 깎아내렸다.
이후 선거제 개혁 논의는 소수 정당을 제외한 거대 양당의 ‘2+2 협의체’를 통해 진행됐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국민의힘은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회귀를 주장했지만, 민주당은 준연동형과 병립형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4·10 총선이 임박한 2024년 2월5일에야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유지를 결정했다. 이후 진행 상황은 4년 전과 판박이다. 양당은 각각 위성정당을 창당한 뒤 기호 앞번호를 차지하기 위해 앞다퉈 ‘의원 꿔주기’를 실행하고 있다. 김형철 교수는 이런 행태가 반복되는 이유에 대해 “국회 의석 과반을 차지해 제1당이 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선거제도가 가져오는 민주적 효과를 등한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형적인 위성정당 사태는 언제까지 반복돼야 할까. 지병근 교수는 “총선이 임박해 선거제도를 바꾸려 하면 각 정당이 자신들의 이해타산을 계산하느라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기 때문에 개혁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며 “최소 선거 2년 전에는 개혁안에 대한 가닥을 잡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송채경화 한겨레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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