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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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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길 “정치는 직업 아닌 소명…” 발언이 위험한 까닭은

송영길 전 대표 ‘돈봉투 의혹’ 회견에 등장한 ‘86 정치인’ 상투어
직업윤리 결여된 소명의식은 문제적
등록 2023-04-28 19:25 수정 2023-05-02 16:47
더불어 민주당 송영길 전 대표가 2023년 4월22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3구 한 사무실에서 한국 특파원을 만나 2021년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과 관련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파리/연합뉴스

더불어 민주당 송영길 전 대표가 2023년 4월22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 3구 한 사무실에서 한국 특파원을 만나 2021년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과 관련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파리/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이 ‘돈봉투’ 의혹으로 난리가 났다. 대통령실의 외교 논란과 여당 최고위원들의 설화 사건 등으로 반사이익 얻은 것을 몽땅 다 반납했고 역공의 기회를 제공했다. 한쪽이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한쪽이 질세라 폭탄을 터뜨린다. 서로 자폭으로 돕는다. 이 정도 되면 ‘적대적 공생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실책과 문제로 ‘살신성인’하며 서로 적극적으로 도와준다고 봐도 무방하다.

돈봉투 사건은 쉽게 지나갈 일이 아니다. 만일 이 사건이 사실이라면 민주당은 근대 정당으로서 정당성 자체가 흔들린다. 시쳇말로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도 ‘돈’이 10원이라도 개입된다면 그것은 정치를 타락시키는 치명적인 파괴행위로 단죄된다. 민주당이 만일 검찰의 기획 수사, 야당 탄압, 표적 수사 등의 말로 넘어가려 하다가는 정당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정치는 ‘역사와 민족의 부름에 대한 응답’?

이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주당과 이른바 ‘86(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 정치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정치를 하는지에 주목할 말이 나왔다. 송영길 전 대표는 2023년 4월22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연 기자회견의 말미에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이 송 전 대표의 정계 은퇴를 거론했다’는 말에 “저는 정치를 직업이나 생계로 하지 않았다. 제가 정치를 한 이유는 학생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민족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위한 사명으로 하고 있다는 말씀만 드리겠다”고 답했다.

정치를 직업이나 생계가 아니라 역사와 민족(민중)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며 자신은 늘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은 86 정치인들의 상투어다. 자신이 하는 일을 개인의 이익 같은 사적이고 ‘세속적’인 잣대로 폄훼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자신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민족(민중)과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에 따른 일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제는 이 소명의식이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낮춰보면서, 직업윤리를 소명에 대한 응답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정치도 직업이기에 (근대사회라면) 반드시 직업윤리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소명의식이 역사와 민족을 소환할 정도로 ‘숭고한’ 것이라면 ‘세속적인 것’으로서의 직업윤리는 더욱 부수적인 것, 가끔은 성가신 것으로 취급받을 가능성이 크다.

소명은 종교적 의미를 강하게 띤다. 소명이란 ‘부르심’이다. 신이 신의 뜻을 완수하려 나를 부른다. 신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건 피조물로서 마땅한 일이다. 문제는 신의 부르심이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신은 결과로서 말하는 존재이지 (극단적으로 말하면) 과정으로 말하지 않는다.

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믿음이 투철했던 종교 지도자들이 저지른 악행을 보면 알 수 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의 마녀사냥부터 걸핏하면 일어났던 유대인 탄압을 비롯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학살과 독재가 일어난다.

종교화된 정치의 소명의식이 낳은 역사적 비극

많은 사람이 사이비 종교에 대한 광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맹신에 ‘종교적 소명의식’이 있다. 교주는 신이며 교주가 하는 일은 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신의 뜻을 인간의 잣대로 생각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종교화된 소명의식’의 무서운 점이 있다. 소명에는 응답과 순종만이 있을 뿐이다. 질문이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불순한 일이다. 교주의 행동을 따르고 감사해야 한다. 여기에 생각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악의 평범성을 만드는 것은 ‘생각 없음’, 무사유다.

20세기는 종교화된 정치의 소명의식이 얼마나 끔찍한 현실을 만드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현장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의 홍위병이다. 그들은 마오쩌둥의 부르심에 응답해 현장을 초토화했다. 홍위병은 생각하지 않는다. 마오의 어록을 달달 외고 그 어록을 큰 소리로 외치기만 하면 역사를 완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완전히 중화주의자가 됐지만 장이머우가 감독하고 궁리가 출연한 영화 <인생>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다. 홍위병들이 병원을 접수하고 의사들을 지식분자라고 다 내쫓는다. 산모가 갑자기 하혈하며 위독해지자 홍위병들이 “학생이고 경험이 없다”며 우왕좌왕하는 사이, 산모는 죽고 만다. 홍위병은 인간의 삶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인 정치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것을 삶에서 제거한다. 그 결과 삶 자체가 파괴된다.

물론 소명을 이렇게 완전히 종교적 의미에서 맹목적인 것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소명을 직업과 연결해 근대사회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금욕주의가 직업생활 영역으로 이행하여 세속적 도덕들을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청교도들은 직업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소명이 세속과 연을 끊고 골방에 처박혀 저세상으로 가는 궁리하지 않고, 속세에 직업인으로 참여하며 세계를 구축하는 윤리가 됐다. 따라서 베버는 직업 수행이 가지는 의미의 해석을 완전히 포기하기를 우려하고 “스포츠적 특성을 각인하는 순수한 경쟁적 열정과 결합하는 경향”을 비판한다.(2015년 10월 3일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고전 강연에서 재인용) 소명의식이 없어지는 직업윤리를 우려한 것이다.

소명의식을 직업윤리와 연결해 근대사회 설명한 베버

베버의 이야기를 한국 사회에 ‘거꾸로’ 적용해보면 한국은 소명의식이 좀처럼 직업윤리로 전환하지 못하고 종교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특히 정치 영역에서 그렇다. 소명의식이 없는 정치가 문제가 아니라 직업윤리로 전환하지 못한 소명의식이 문제라 할 수 있다. 송영길 전 대표가 말한 “직업이나 생계로 하지 않았다”는 말이 그래서 상징적이다. 생계로 하지 않았다는 말은 ‘돈벌이’로만 하지 않았다는 말이지만 “직업으로 하지 않았다”는 말은 직업을 소명과 분리해 순전히 경제적인 것으로만 여기는 경향을 방증한다.

그 결과 본의이든 아니든 직업세계에 속한 사람과 자신을 분리한다. 보통 사람이 직업세계에 속해 노동하는 이라고 한다면, 자신은 정치로 세계를 바꾸거나 구축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노동이 아니라 활동으로 보기 때문에 ‘직업’으로 분류하는 것을 거부한다. 사람을 만나고 세계를 구축하고 변화하는 활동을 하기에 자기만이 ‘활동적 삶’(Vita Activa)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직업윤리 없는 정치에의 몰두가 세계를 구축하기는커녕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지 목격하고 있다. 최근 학교폭력 피해자 유족을 대리하던 변호사가 세 번에 걸쳐 항소심 법정에 불출석해 자동 패소한 사건이 그것이다. 그 변호사는 현실의 온갖 정치 현안에 입을 다 대는 ‘활동’에 바쁜 나머지, 자기 직업에는 소홀했고 그 결과 의뢰인에게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안겼다.

이는 한국에서 정치의 소명의식에 젖은 사람들이 직업윤리를 얼마나 내팽개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불온한 사건이다. 근대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세계 전체의 구원을 추구하는 소명의식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직업세계에 충실해지길 요구하는 직업윤리이다. 근대사회는 ‘직업’과 직업집단을 매개하지 않고 바로 세계와 직접 결합하지 않는 사회이며, 오히려 그런 신 혹은 세계와의 직접 결합인 ‘직통 계시’를 위험시한다. 정치는 ‘정당’을 매개하고, 교육은 ‘학교’를 매개한다. 그리고 그 매개하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근대의 ‘직업’이다.

매개하는 것으로서의 직업은 무엇보다 자기 직업세계의 정당성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직업윤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윤리다. 교수를 예를 든다면, 교수는 개인의 품성이 어떠하든지 사회에서의 시민윤리가 어떠하든지, 교수로서 직업윤리를 잘 지킴으로써 사람들로부터 교수라는 직업집단에 대한 신뢰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강의를 밥 먹듯이 빼먹고 사회참여를 한다면 그는 교수집단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신뢰를 붕괴시킨다. 세계를 구원한다지만 자기 직업집단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신뢰를 붕괴시키는 일이야말로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위험한 행위다.

직업윤리 지키지 않으면 전체 집단 신뢰 무너져

이번 돈봉투 의혹과 송영길 전 대표의 말로부터 민주당 86 정치인들이 생각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자신들이 어떤 숭고한 목적을 갖고 어떤 소명의식으로 살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들의 내면세계에서나 중요하다. 그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직업인으로서의 윤리다. 자신을 직업인으로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 직업세계와 그 안에 있는 사람들(동료)을 보호하려는 직업윤리에 긴장감이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이 긴장감이 없다면 그 직업세계를 떠나야 한다. 보호해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 그 직업세계와 그 세계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직업이 전체 세계에 위해를 주는 정치일 때는 말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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