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게임이론은 양 당사자가 합리적으로 판단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죄수의 딜레마도 생기지만 거꾸로 상호 신뢰 게임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한쪽은 합리적이었고, 다른 쪽은 바보였다. 한국이 반잔을 채웠으니 일본이 나머지를 채운다고 한다. 과연 합리적인 쪽에서 바보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서 바보짓을 하겠는가.”(우석훈 성결대 교수)
2023년 3월16~17일 일본 도쿄에서 12년 만에 열린 한-일 정상회담이 거센 후폭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반발이 거세지자 윤석열 대통령은 3월21일 국무회의 머리발언을 통해 23분 동안 해명했다. “한·일 양국은 가장 가깝게 교류해온 숙명의 이웃 관계다. 한-일 관계도 이제 과거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제동원 피해자 쪽과 시민·종교·학술 단체들은 잇따라 기자회견과 집회를 열어 윤 대통령의 사과와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 박진 외교부 장관의 사퇴를 요구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정상회담이 윤 대통령의 탄핵 사유가 된다며, 국회 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여론조사 결과도 한·일이 명확히 엇갈렸다. 3월13~17일 리얼미터의 전국 성인 2505명에 대한 조사에서 윤 대통령 직무수행의 긍정 평가는 36.8%로 2주 전 42.9%보다 6.1%포인트 떨어졌다. 반면 일본 <아사히신문>이 3월18~19일 일본 유권자 1304명을 조사한 결과에선 기시다 내각 지지율이 지난달 조사보다 5%포인트 오른 40%를 기록했다.
윤석열 정부의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한-일 정상회담의 주요 쟁점에 대해 관련자와 전문가 11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전문가들은 윤 대통령이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 앞서 3월6일 발표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해법인 ‘제3자 변제’가 위헌적이라고 지적했다.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 일본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행정부 수장이 사실상 부정했기 때문이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이번 정부의 해법과 정상회담에서 윤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을 부정했다. 한-일 관계 파탄의 원인이 일본 기업과 아베 신조 전 총리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대법원 판결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삼권분립이라는 한국의 헌정 질서를 부정한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윤석열 정부의 해법을 지원했어야 할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에 대한 사과나 일본 가해 기업의 참여 방안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강제동원 피해자를 ‘옛 한반도 출신 노동자’라며 강제동원 자체를 부인하는 용어를 썼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한국 정부나 기업이 대신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양금덕(94), 김성주(95), 이춘식(100) 등 강제동원 피해자 3명은 3월6일 정부가 발표한 강제동원 배상을 제3자가 변제한다는 방안을 명확히 거부했다. 양금덕 할머니는 3월13일 국회에서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돈 안 받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3월13일 “제3자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증명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전달했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동의 없이 제3자가 채권을 변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가해자인 미쓰비시중공업의 한국 내 자회사의 자산을 바로 현금화해 배상하도록 하는 소송도 냈다.
강제동원 피해자 변호인단의 임재성 변호사는 “한국 정부의 이번 해법에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일방적 공탁을 할 텐데, 이는 허용되지 않는다. 일본 기업 쪽에 피해자들의 반대 의사가 명확히 도달하면 피해자들의 채권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도 “피해자들이 반대하는 제3자 변제는 불법적이다. 따라서 반대하는 피해자들이 추심 소송이나 무효 소송을 내면 해결하기 어렵다. 이렇게 되면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책임을 전가하면서 이 상황에서 빠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그나마 성과라고 말할 수 있는 대목은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다. 3월16일 정상회담 뒤 윤 대통령은 “일본은 3개 품목 수출규제 조치를 해제하고,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철회했다”고 발표했다. 또 “화이트리스트에 대해서도 조속한 원상회복을 위해 긴밀한 대화를 이어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상회담 당일 일본의 니시무라 야스토시 경제산업상은 한국 대통령의 발표에 찬물을 끼얹었다. 니시무라 경제상은 이날 밤 트위터에 “(3개 품목의) 수출관리 조치가 해제된 것이 아니다. 한국의 세계무역기구 제소 취하를 확인하고 (…) 일정한 개선이 인정돼 운용을 재검토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해제’가 아니라 ‘재검토’였다.
우석훈 교수(경제학)는 “수출규제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글로벌 밸류 체인(지구적 가치 사슬)을 깬 일이다. 그 뒤 한국 스스로 국산화나 수입다변화를 통해 문제점을 해결해왔다. 전혀 시급한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 얼마나 이득이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 정부와 기업이 기울인 국산화 노력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일본이 수출규제를 발표한 2018년에 3개 품목의 일본 의존도는 포토레지스트 93.2%, 불화폴리이미드 44.7%, 불화수소 41.9% 등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수출규제 직후 해당 품목 연구개발에 2485억원의 추가경정 예산을 배정했다. 이에 따라 2022년 3개 품목의 일본 의존도는 각각 77.4%, 33.3%, 7.7%로 떨어졌다. 또 이들 품목을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거나 다른 나라를 통해 일본 제품을 수입하기도 했다.
오히려 수출규제로 큰 손해를 본 것은 일본 기업들이었다. 2020년 관련 일본 기업의 영업이익은, 포토레지스트 기업인 제이에스아르(JSR)는 전년보다 27.4% 줄었고, 불화폴리이미드 기업 스미토모화학도 10.5%, 불화수소 기업인 스텔라케미카도 31.7% 줄어들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경제학)는 “한국 기업들이 관련 품목을 개발해왔고 국내 공급망도 만들어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일본 제품의 수입을 늘리는 것이 경제 안보나 공급 안정성 차원에서 바람직한지 모르겠다. 일본 정부의 태도를 보면,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3월21일 윤 대통령은 국무회의 머리발언에서 국내 기업에 대한 언급 없이 “용인에 조성할 예정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일본의 기술력 있는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을 대거 유치하겠다”고 말했다. 이런 계획이 어느 나라 기업에 더 도움이 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강제동원 이상으로 한-일 간 핵심 쟁점이다. 이와 관련해 3월16일 일본 <교도통신>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한-일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합의의 착실한 이행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국내외 소녀상 철거에 협력하고 일본의 출연금을 한국이 적절히 소진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시다 총리는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책임자인 외무상이었다.
이와 관련해 김태효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1차장은 2023년 3월18일 와이티엔(YTN)에 나와 이 문제에 대해 “정상회담에서 오고 간 정상들의 대화는 다 공개할 수가 없다”면서도 “앞으로 양국이 추가로 할 조치는 남아 있지 않다. 화해치유재단의 잔액을 적절하게 미래지향적으로 사용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정의기억연대의 이나영 이사장은 “2015년 ‘위안부’ 합의는 피해자 중심 원칙에서 어긋난 역사적 퇴행이며, 이 문제의 해결 방안이 아니다. 한국 정부는 국제법에 따라 일본 정부에 범죄 사실 인정과 사과,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는 10억엔을 한국의 화해치유재단에 출연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과와 배상이 없었던 이 합의에 대해 ‘위안부’ 할머니들이 반발하자 문재인 정부는 2018년 일본 정부에 화해치유재단 해산을 통보했다. 일본의 출연금은 현재 50억원 넘게 남아 있다. 문 정부는 일본 정부의 출연금을 돌려주기 위해 양성평등기금에 103억원을 예치해뒀다.
3월20일 일본 <산케이신문>은 “16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가 후쿠시마현 수산물에 대한 수입규제 철폐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또 국민의힘 관계자는 같은 날 “기시다 총리가 ‘후쿠시마 오염수 방출에 대해서도 협조해달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국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주변 8개 현의 모든 수산물과 주변 14개 현의 27개 농산물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이들 문제와 관련해 ‘과학적인 문제와 정서적인 문제가 다 해소돼야 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환경운동연합의 이용기 생태보전팀장은 “후쿠시마산 농수산물을 누가 사 먹겠는가. 수입을 허용하면 원산지를 속이거나 국내산과 섞어서 파는 등 불법 유통될 것이다. 어민과 소비자를 보호하려면 수입금지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환경운동연합의 최경숙 활동가도 “환경단체들은 원전 오염수를 최소 100년 이상 장기 보관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100년 정도면 방사성물질의 독성이 어느 정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한국 정부가 명확히 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한-일 정상회담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고 윤석열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진돼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고 평가했다.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전 통일외교안보 특보)는 “원래 외교는 주고받는 것인데, 이번에 윤 대통령은 먼저 주고 나중에 받겠다고 했다. 그런데 외교에 노련한 일본 정부에 그것이 통할지 의문이다. 안보와 경제를 위해 역사와 정체성을 포기한 셈인데, 그것이 교환될 수 있다고 본 것은 착각이다”라고 말했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대실패다. 한-일이 협상한 흔적도 없다. 그냥 윤 대통령과 김태효 차장 같은 사람들의 신념대로 처리한 것 같다. 역사의식이 없고 피해자의 아픔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한국 정부가 지켜온 기조가 있는데, 현 정부가 완전히 뒤집어버렸다”고 말했다.
이번 정상회담의 실패가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지지 않을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문재인 청와대의 탁현민 전 의전비서관은 “원래 정상회담은 실패할 수 없다. 사전에 실무자들이 모두 조율해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회담을 하면 지지율이 오른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외국만 나갔다 오면 문제가 생긴다. 준비되지 않은 외교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였다면 가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전 국립외교원장)는 “일본은 이번에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앞으로 독도나 ‘위안부’, 후쿠시마 등 다른 문제까지 모두 테이블 위에 꺼낼 것이다. 한국 정부가 관계 개선을 절박하게 원했기 때문에 주고받는 정상적 외교가 어렵다”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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