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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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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운명에서 해방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나의 해방일지’는 이제부터…
‘노무현의 그림자’에서 시작된 12년의 정치 여정 마무리
등록 2022-05-14 01:55 수정 2022-05-14 08:28
문재인 전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2022년 5월10일 사저가 있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의 평산마을회관에 도착해 동네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눈 뒤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문재인 전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2022년 5월10일 사저가 있는 경남 양산시 하북면의 평산마을회관에 도착해 동네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눈 뒤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저는 이제 완전히 해방됐습니다. 자유인입니다.”

2022년 5월10일 경남 양산 집으로 향하는 길.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방’이라는 단어를 세 차례나 말했다. 보통 ‘민주주의’ 또는 ‘선도국가’ ‘코로나19’ 등의 단어가 나왔던 그의 입에서 ‘해방’과 ‘자유’를 듣다니 낯설었다.

5년 임기를 마친 문 전 대통령은 후련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뒤 울산행 대통령 전용열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으로 와선 “시골로 돌아가는 것 섭섭해하지 마십쇼. 저는 해방되었습니다. 뉴스 안 보는 것만 해도 어디입니까”라고 했고, 울산역 앞 지지자들에게 “저는 이제 자유인입니다.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훨씬 부유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울산역에서 차를 타고 새집이 마련된 양산 평산마을에 도착한 뒤엔 “제가 살 집 위로 햇무리가 뜬 사진을 봤습니다. 저를 축하해주는 것이었고 여러분 모두를 환영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내와 함께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잘 살아보겠습니다”라고 ‘해방’된 마음을 꺼내놨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5월9일 저녁 청와대 정문을 걸어 나오며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5월9일 저녁 청와대 정문을 걸어 나오며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기에 앞서 101경비단 등의 직원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기에 앞서 101경비단 등의 직원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 됐다” 자평

‘해방’으로 향하는 길은 단순히 ‘뉴스’로부터 떠났음은 아닐 것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9년 돌연 세상을 떠난 뒤 피할 수 없었던 ‘정치’로의 여정이 마침내 끝나서다. 문 전 대통령과 동고동락했던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은 “사람들은 양정철 비서관이나 제가 2010년에 대통령을 추동해서 (정치로) 끌어냈다고 보지만, 사실은 본인의 결단이 2009년 또는 2010년에 있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이어진 12년이 끝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 전 대통령은 2011년 펴낸 자신의 책 <문재인의 운명>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썼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의 책무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며 정치에 뛰어든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2년 부산 사상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바로 그해 제18대 대선에 도전했다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석패했다. 이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일찍 치른 2017년 5월 대선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뒀다.

그는 2017년 5월23일 봉화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추도식에서 “현직 대통령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했다.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 임무를 다한 다음 다시 찾아뵙겠다”는 결연한 마음도 밝혔다. 그리고 그는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이른바 ‘적폐’를 청산하는 일로 나아갔다. 검찰개혁 등이 대표적이다. 그를 추앙하는 이들이 풀어주길 바라는 ‘숙제’였고, 그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2022년 5월9일, 그는 퇴임 연설을 통해 ‘숙제’가 끝났음을 국민에게 보고했다. 3300여 자에 이르는 연설문에는 한반도 전쟁 위기,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코로나19 등 위기 상황을 하나하나 어떻게 극복해냈는지가 담겼다. 이를 통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가 됐다고도 했다. ‘자화자찬’이라는 비판 여론도 있었지만 문 전 대통령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앞서 손석희 전 제이티비시(JTBC) 앵커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부동산 가격 안정 실패와 정권 재창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내놨다. 윤석열 대통령의 ‘졸속’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대해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문 전 대통령 주변 참모들도 그의 발언을 듣고 “내가 아는 그분이 맞나” 하며 어리둥절해할 정도였다. 임기 5년 내내 휴가도 제대로 가지 못했던 대통령으로서 ‘숙제를 다 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이 5월10일 서울역에 배웅 나온 시민들에게 인사말을 한 뒤 마이크를 김정숙 여사에게 건네자 김 여사가 사양하고 있다.

문 전 대통령이 5월10일 서울역에 배웅 나온 시민들에게 인사말을 한 뒤 마이크를 김정숙 여사에게 건네자 김 여사가 사양하고 있다.

문 전 대통령이 평산마을에 도착해 환영 나온 지지자와 시민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문 전 대통령이 평산마을에 도착해 환영 나온 지지자와 시민들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환영 시민 떠나자 “문재인은 간첩” 욕설도

문 전 대통령은 양산으로 가는 기차에 150여 명의 전·현직 청와대 참모와 국무위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을 가득 태우고 ‘금의환향’했다. 그는 기차 안을 돌며 일일이 악수하고,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받았다. 5월9일 대통령 근무를 마친 뒤 퇴근하고 찾아간 청와대 분수대 앞과, 5월10일 서울역·울산역·평산마을 어디에서도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는 실망스러운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다시 출마할까요?”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평산마을 집 앞에 마중을 나왔던 지지자들이 물러간 5월10일 저녁. 양산 토박이인 김태수(69)씨는 물끄러미 문 전 대통령이 들어간 집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동네 하나밖에 없는 초등학교 출신이어서 동네 사람 대부분을 안다는 김씨는 “주변 마을 사람들도 문 전 대통령을 환영한다고 하더라. 가끔 동네 분들과 막걸리나 하면서 편안히 지내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씨가 자리를 떠난 뒤엔 “문재인은 간첩”이라고 큰 소리로 욕하는 사람들이 마을 밑에서부터 올라왔다. 마을 앞 주차장엔 ‘태극기 모임’이라 쓰인 대형 버스가 세워져 있었다. 이들은 경찰이 도로를 막아놓은 바리케이드 앞에서 발길을 돌렸지만, “욕하지 말라”는 문 전 대통령 지지자들과의 사이에서 시비가 붙었다.

다음날인 5월11일 오전. 박수현 전 국민소통수석과 박경미 전 대변인 등 청와대 참모들에 이어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 유은혜 교육부 장관, 김태년 전 민주당 원내대표 등이 평산마을 집을 찾았다. 문 전 대통령을 만난 이들 가운데 한 인사는 “집 밖에서 손만 흔들고 가려다 차를 한잔 주시겠다고 해서 들어갔다 왔다. 문 전 대통령 얼굴이 하루 만에 좋아지셨다”며 “문 전 대통령은 되도록 누구도 만나는 약속을 이제 안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이날 문 전 대통령은 집 밖에 나오지 않고 고양이를 안고 집 안을 산책하는 모습만 눈에 띄었다.

문 전 대통령이 귀향 이튿날인 5월11일 평산마을 사저를 찾은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오른쪽 둘째) 등 옛 보좌진과 이야기하고 있다.

문 전 대통령이 귀향 이튿날인 5월11일 평산마을 사저를 찾은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오른쪽 둘째) 등 옛 보좌진과 이야기하고 있다.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 그칠지

대통령에서 퇴임했지만, 그의 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5월22일 만남이 예정돼 있다. 순방한 나라의 전직 대통령과 만나는 일은 이례적이다. 그다음 날인 5월23일에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지금은 이사 뒤에 집 정리하고 조용한 시간을 가지겠지만 노무현 대통령 추도식 뒤에 어떤 삶을 보여줄 것이냐가 (문 전 대통령 이후 삶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6월 지방선거까지는 자기 뜻이 아니더라도 윤석열 정권 대척점의 상징처럼 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문 전 대통령은 퇴임을 앞두고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국정지지율 40%를 넘기는 등 윤석열 당시 당선자보다 높은 인기를 보여줬다. 하지만 전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문 전 대통령이 정치적 욕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윤석열 정권이) 건드리지 않는 이상 먼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잊혀진 삶을 살겠다”고 퇴임 뒤 계획을 말했던 문 전 대통령은 5월12일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SNS에 글을 올렸다. 이제부터가 ‘그의 해방일지’를 써내려갈 시간이다.

양산=글 이완 기자 wani@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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