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대통령선거를 엿새 앞둔 2022년 3월3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확대 관계장관회의를 소집해 직접 주재했다. 그날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쏴서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과 관련해 돌발 상황이 벌어져서도 아니다.
대통령은 국가안보실에서 ‘2021~2030 안보 위협 전망’ 보고를 받고, 안보와 경제 분야 장관들과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국가안보실은 “향후 10년(2020년대)이 우리의 선진국 위상을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 10년’이 될 수밖에 없다”며 “글로벌 전환기 국가안보전략 검토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했다”고 보고했다. 요컨대 ‘긴급 현안 대응’이 아닌, 적어도 10년을 시야에 둔 중기 대외전략 검토·마련이 회의 소집·주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회의를 마치며 이렇게 짚었다. “현재의 안보 양상은 매우 복합적입니다. 팬데믹이 발생하면서 공급망 주도를 위해 경쟁하고, 신흥기술을 선점하고 유지하기 위한 경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진행되는 양상의 배경에는 민주주의, 인권 등 가치와 체제의 문제도 있습니다. 국가 간 블록화가 진행되고 신냉전의 양상도 보이며, 그러한 양상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증폭되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공급망·신흥기술·가치·체제·블록화·신냉전…, 연원과 차원을 서로 달리하는, 그러나 대한민국의 진로에 중차대한 영향을 끼칠 국제질서 재편의 방향타다. 문 대통령은 이러한 생태위기, 첨단전략기술 선점 경쟁, 국가 간 이합집산 따위를 “새롭고 복합적인 안보 위기”라 규정했다. 그러고는 “정부는 마지막까지 복합적인 안보 위기에 대한 대응역량을 강화해, 차기 정부가 처음부터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경제·안보 환경의 변화가 매우 복잡하고 난해하지만, 두 축이 특히 중요하다. 첫째, ‘미국·중국·러시아 신삼각 전략게임’의 향배다. 둘째, 북-미 적대관계 지속의 치명적 부산물인 ‘북한 핵 문제’다. 후자가 동북아시아의 비대칭 탈냉전 이후 30년 넘게 대한민국의 앞길을 방해해온 고질적 장애물이라면, 전자는 30년 전 옛소련과 동유럽사회주의 국가의 연쇄 체제 전환으로 사라졌다 여겨온 ‘적대적 진영 대결’의 복귀 조짐이다.
본질적으로 한데 엮인 두 ‘쓰나미’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라질 터. 앞으로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 새 대통령 당선자가 5월10일 정식 임기 시작 전부터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할 전략 과제다.
미-중 패권 경쟁이 가열되는 와중에 터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그에 따른 미-러 대치, 중-러 협력 따위가 뒤엉켜 국제질서의 원심력에 가속을 일으키며 전략 지형 변화를 예고한다. 냉전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립의 최전선이었던 한반도가 21세기 ‘미국 대 중국·러시아’ 충돌의 단층선으로 다시 내몰릴 위험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문 대통령이 3·1절 103돌 기념사에서 “힘으로 패권을 차지하려는 자국중심주의”의 부상과 “신냉전의 우려” 확산을 짚으며 “우리가 더 강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한반도 평화”라고 강조한 까닭이다.
미국은 한국의 유일 동맹국이고, 중국은 최대 교역국이다. 더구나 미·중은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3년 전쟁’의 교전 당사자이자 정전협정 서명국이다. 러시아는 6자회담 당사국이다.
20세기 냉전 적대의 민낯인 ‘한국전쟁’과 장기 분단, 북한의 ‘핵 집착’과 북-미 적대관계로 상징되는 ‘한반도 안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자면 남과 북의 주체적 노력은 물론 미·중·러와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미-중 패권·전략경쟁이 격화하며 나라 안팎에서 ‘양자택일’ 압력이 높아지는데도 문 대통령이 “굳건한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한-중 관계도 조화롭게 발전시켜나간다”는 전략 기조를 꺾지 않는 배경이다. 정부가 미국 등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춰 대러시아 제재에 나서면서도 한-러 북핵 수석대표 협의를 하는 등 “북핵 문제와 남북관계 개선에 러시아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까닭이다.
요컨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가동해 ‘냉전의 외딴섬’에서 벗어나자면 미·중·러 3국 모두의 협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포기할 수 없는 ‘한국의 길’이다.
상황은 엄중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3월2일 집권 뒤 첫 국정연설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칭했다. 그러곤 푸틴을 응징하는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Korea”(한국)를 콕 집어 거명했다. 아울러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이름을 부르곤 “미국인들에 맞서 베팅하는 건 결코 좋은 베팅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자유는 언제나 폭정에 승리할 것”이라 선언한 바이든 대통령의 ‘가치전쟁’에 맞닥뜨린 한국의 길은 비좁다. 이미 미·중·러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가 힘겨워지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한국 정부의 대러 제재 수위가 높아지는데, 한-러 협력의 가능성은 그에 반비례해 낮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단 한 차례도 입에 올리지 않은 사실은 징후적이다. ‘북핵·북한 문제’가 바이든 대통령의 (우선) 관심사가 아니라는 방증이어서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대북 집중력 약화는 한반도 평화와 ‘북핵 문제’ 해결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바이든 대통령의 ‘무관심’에,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은 2022년 들어 벌써 아홉 차례(3월9일 현재)나 탄도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최근엔 “정찰위성 개발”을 앞세우는데, 사실상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예고’하는 셈이다. 나라 안팎의 전문가들은 김정은 총비서가 김일성 주석 110회 생일인 4월15일 태양절을 계기로 위성 발사 형식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해왔다. 4월15일은 한국의 정권교체기다.
‘미·중·러 신삼각 전략게임’ 탓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사실상 붕괴 위험에 처했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다. 김정은 총비서의 ‘핵외교’가 본격화하는데도 유엔 안보리가 ‘미국 대 중국·러시아’의 갈등 탓에 이를 제어하지도 대화와 협상의 장을 마련하지도 못하는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진다면 한반도 정세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빨려들 위험이 있다.
새 대통령은 미·중·러 3국 모두에서 협력을 이끌어내고, 김정은 총비서를 회담장으로 불러내 한반도 평화의 길을 다시 열어갈 수 있을까? 지금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그러나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다. 대통령 당선자한테 평화의 길을 열어갈 지혜와 용기가 함께하기를.
이제훈 <한겨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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