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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갈등과 통합, 두 얼굴의 야누스

갈등을 드러내지 못하는 평화처럼 무서운 폭력은 없어, 중요한 갈등을 포착해 제도화하는 것이 정치
등록 2022-01-10 08:41 수정 2022-01-11 02:40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60여 일 앞두고 한국 정치는 롤러코스터를 탄 듯이 어지럽다. 하지만 대선 후보의 말과 행동, 그 가족을 둘러싼 의혹, 당 내부 권력투쟁 등을 단순히 중계하는 정치 보도만 있을 뿐, 한국 정치구조의 심층을 깊이 분석하는 글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 중앙대 교수와 국회·청와대를 출입한 이세영 <한겨레> 논설위원이 한국 정치에서의 갈등과 통합, 포퓰리즘 등을 주제로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품격 있는 정치칼럼을 연재한다. ‘신진욱×이세영의 정치 크로스’는 앞으로 릴레이 형식으로 이어진다. _편집자

탈모약 얘기부터 해보자. 얼마 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검토 중이라는 ‘탈모약 건강보험 적용’ 공약에 대해 탈모 관련 커뮤니티에서 호응이 뜨거웠다. 민주당은 이슈 키우기에 들어갔고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도 찬성 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국민 생명과 건강에 필수적인 의료서비스를 중심으로 건강보험 보장성을 높여야 한다는 비판이 일었고,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탈모약 가격 인하와 신약 개발 지원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개사과’ 논쟁보다 탈모

그동안 대선을 앞두고 줄곧 후보 인신공격이나 당내 계파싸움만 보던 중에 이번 탈모약 논쟁이 가뭄의 단비처럼 신선했던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많은 유권자의 관심사이고,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정책적인 해결책에 관련되며, 다른 많은 건강보험의 비급여 부문과 탈모약 사이에 중요성 우선순위를 놓고 심도 있는 쟁점이 형성됐다. ‘개사과’ 논쟁보다는 훨씬 유익하지 않은가?

그런데 다음 질문은 이런 것이다. 끔찍하게도 익숙한 이 사회의 다른 많은 중대 문제에 대해서도 이런 갈등과 정책 대결이 일어나고 있는가? 항만에서 일하던 23살 노동자가 컨테이너 철판에 깔려서, 결혼을 앞둔 배전공이 고압 전류에 감전돼서, 60살 청소노동자가 휴게실에서 심장이 멈추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매일 쓰러져갈 때 우리는 값싼 찰나의 애도 따위 말고 정말 싸우고 있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과연 정치에서 갈등이란 무엇이며, 또 사회의 통합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한국 사회의 갈등이 심각하다는 건 다들 인지하고 있다. 정치 양극화로 나라가 두 쪽 났다는 우려가 크고, 정치인이 사람들을 ‘갈라치기’ 한다는 비판도 많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갈등 자체가 문제일까? 이 사회는 이미 너무 다른 세계들로 무심히, 무참히 갈라져 있는데 말이다.

20세기 정치학의 대가 중 하나인 모리스 뒤베르제는 <정치란 무엇인가>에서 정치는 권력을 장악하여 지배하기 위한 투쟁인 동시에, 또한 일반이익과 공동선을 보장하는 수단임을 강조했다. 그는 이 두 측면의 공존과 연계가 바로 정치의 본질이며, 그래서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의 상이야말로 국가의 상징임이 틀림없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이 양면성은 조화롭게 어울리기는커녕 언제나 정치와 통치의 근본 문제였다. 사회학자 라인하르트 벤딕스는 그의 저명한 역사서인 <왕이냐 인민이냐>에서 고대국가의 통치자들에게조차 전제적인 지배체제에서, 신(神) 또는 민(民)의 위임을 받은 공동체의 수호자로서 통합력을 과시하고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어려웠는지 보여줬다.

변화된 자본주의의 새로운 갈등

그런 통합의 힘은 평화로운 동의의 기반 위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모든 문명사회에서 정치권력의 중심부는 정통과 이단 간의 격렬한 투쟁의 결과로 결정됐고, 낡은 권력의 붕괴와 새로운 권력의 탄생 역시 그러한 갈등을 통해 일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갈등과 대립 자체가 사회를 해친다는 생각은 타당하지 않다. 갈등을 드러내지 못하는 평화처럼 무서운 폭력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관건은 갈등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어떤 갈등이 지배하고 있으며 갈등이 어떻게 다뤄지느냐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민주주의사회가 존속하는 것은 수많은 잠재적 갈등에 우선순위를 부여하여 갈등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싸구려 잡화점에서 물건을 사는 일이 아니라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과 같다.”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에 나오는 탁월한 통찰이다.

정당의 의무는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포착해 진단과 해법을 명료히 함으로써 갈등을 가시화, 구체화하고 제도화하는 일이다. 만약 정당이 사회의 중요한 갈등에 무관심하거나 갈등의 본질을 정의할 능력이 없다면 그 사회는 억눌린 갈등으로 썩어 들어갈 것이다. 반대로 정당이 수많은 갈등에 불을 붙여 분노의 에너지로 권력을 꾀한다면 그 사회는 증오의 불로 타버릴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지금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정당들은 변화된 자본주의의 새로운 갈등을 포착해 문제 해결을 위한 다수의 지지를 조직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소득불평등 심화, 비정규직 증가, 플랫폼노동 등 다양한 종류의 새로운 불안정성 등장, 주택가격 폭등과 자산 격차 확대 등 여러 사회문제가 점점 심각해지는데, 정치의 대응능력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이다.

<21세기 자본>으로 잘 알려진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최근 저작인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오늘날의 정치 지형을 다중엘리트체제로 규정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경제적 불평등 심화와 더불어 정치에서도 좌우 엘리트 집단의 폐쇄된 지배체제가 구축돼서, 고학력 진보 유권자에 기반을 둔 ‘브라만 좌파’와 경제적 상층을 대변하는 ‘상인 우파’가 서로 정권을 주고받는 식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선 민중 부문을 대변해줄 정치세력이 없다. 그래서 하층계급의 정치 불신이 깊어지며, 권위주의나 민족적·종교적 정체성 정치 같은 위험 세력이 성장할 공간이 생성된다. 프랑스 국민전선이나 스웨덴 민주당의 복지내셔널리즘, 독일대안당의 반이민·반난민 노선, 독일에서 시작된 ‘서양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 유럽인’(PEGIDA) 운동 등이 그런 예다.

진공 또는 공백에서 나온 우익 정치세력

이런 상황은 무엇보다 새로운 사회갈등과 오래된 정당 간의 부조응에서 초래된 ‘진공’ 또는 ‘공백’에서 시작됐다.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세계화와 그 불만>에서 중도 좌우 정당이 노동자와 하층민을 방어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트럼프나 르펜 같은 우익 세력이 “진공을 메우려고 몰려들었다”고 설명했다. 아무도 대변해주지 않는 곳에서 위험한 대변자의 권력이 싹튼다.

그러면 기성 정당들은 왜 새로운 사회현실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일까?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그의 ‘포스트 민주주의’ 이론에서 그 대답을 모색했다. 여기서 포스트 민주주의란 민주주의 제도의 형식은 유지되지만, 정치권력이 경제권력과 결탁하면서 그 민주적 대표성을 대중으로부터 의심받는 상태를 뜻한다. 이는 정당들이 사회계급들로부터 유리됨을 뜻한다.

그러한 정당-사회 분리는 언제부턴가 도덕적 정치인이 사라져서 생긴 일이 아니다. 더 구조적인 문제는, 많은 자본주의사회에서 계급구성과 갈등구조가 크게 변하면서 기존 정당들이 누구와 누구를 규합하고 누구와 다퉈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는 데 있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다면 누가 그들의 적인가? 기업인가, 정규직인가, ‘기성세대’인가, 외국인인가, 이슬람인가, 페미니스트인가.

20세기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당들의 갈등과 경쟁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계급 균열이었다. 사회민주당, 사회당, 노동당 등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주요 정당이 한편에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자본가와 중산층을 주로 대변하는 보수 정당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구조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자본과 노동, 지배층과 민중으로 단순히 나눠서 정당이 어느 한쪽을 조직하고 대변하기 힘든 사회환경이다.

‘분배냐 정체성이냐’ 상투적 이분법을 넘어서

전통적으로 좌파정당의 사회적 기초였던 제조업 노동자의 비중은 축소됐고 증가하는 서비스노동자는 공장노동자와 매우 다른 노동환경에 놓여 있다. 고학력 화이트칼라 집단이 증가했는데 이들의 정치성향을 하나로 규정할 수 없어서 신우파와 신좌파가 다 여기서 나온다. 보다 최근에는 종속적 자영업자, 플랫폼노동자, 긱경제(Gig Economy) 종사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되는 새로운 집단이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복잡하고 유동적인 갈등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환경에서는 정당들이 ‘51%’의 다수를 구성하기 위해 어떤 갈등을 부각할지, 누구를 대변하고 누구와 다툴지를 분명한 노선으로 정립하기 어렵다. 특정 사회집단을 대표해온 전통적인 정치는 거기에서 배제되는 다른 많은 집단을 잃는 데 반해 오히려 이질적 집단들을 유연하게 접합시키는 ‘포퓰리즘’의 정체성 정치가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대환경에서 노동자·농민과 진보적 중산층을 주축으로 하는 진보정치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혁신을 달성하려면 ‘분배 정치냐? 정체성 정치냐?’라는 상투적 이분법을 넘어서는 관점이 요구된다. 정체성 정치 없이 단지 분배 정치만 하면 되는 명확한 균열 구조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분배 정치가 없는 정체성 정치는 고학력 중산층의 문화정치에 불과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는 이 모든 21세기의 보편적 문제 상황을 공유하고 있지만, 한국의 특수한 역사와 현실이 거기에 보태진다. 민주화 이후 유권자 균열은 처음엔 지역주의 성격이 강했고 안보 이슈의 영향이 컸지만, 2000년대 들어와서는 세대·가치·이념에 따른 갈등이 중첩됐다. 보다 최근에는 소득 수준, 자가 소유 여부, 자산 규모 등 계층 균열도 커지고 있다.

의제의 다양성이 커진다는 점도 큰 도전이다. 최근 많은 인식조사에서 한국인 다수가 계층갈등과 이념갈등을 가장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결과가 나오지만 젠더와 페미니즘, 기후위기, 성소수자 인권 등 다른 이슈들의 점화력이 그보다 약하지 않다. 이처럼 오늘날 균열의 축은 하나가 아니며, 하나의 이슈에서 진보주의자가 다른 이슈에서도 진보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다중적 갈등의 현실에 진지하게

탈모약 얘기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비정규직 700만 시대에 탈모약 논쟁이 웬 말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탈모 경험자가 700만이고 그들이 때론 구직, 연애, 혼인 등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나에게 절실하지 않은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절실할 수 있다. 다중적 갈등의 현실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대선을 앞두고 우리 사회는 격한 갈등을 겪고 있다. ‘대장동’ ‘고발 사주’ 의혹부터 ‘쥴리’ ‘혜경궁’까지 숱한 이슈가 터졌다. 그런데 필자가 분석한 바로는 2021년 여름에 정당들의 대선 후보 경선이 시작된 이후 정치인들의 말과 대선 보도에서 노동, 주거, 복지, 젠더, 기후 등 이슈가 다뤄진 적이 거의 없다. 일단 이기는 게 중요하고 당선되면 하겠다는 약속에 고개를 끄덕일 유권자가 몇이나 있겠는가.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신진욱의 질문
지금 한국 사회에서 대결정치의 폐해가 크다고들 한다. 사람들을 서로 적으로 돌려서 자기편을 결집하는 이른바 ‘갈라치기’에 대한 비판도 많다. 하지만 사회의 중요한 쟁점을 놓고 다투고 경쟁하는 게 정치다. 그럼 제대로 된 갈라치기란 무엇일까? 지금 한국 정치의 문제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 걸까? 이세영 논설위원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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