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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낙연은 오늘도 ‘엄중히 보고 있다’

‘부자 몸조심’? 팬덤 없지만 ‘오버’하지 않고 선을 잘 지키기 때문
등록 2020-06-20 15:06 수정 2020-06-22 10:14
강창광 선임기자

강창광 선임기자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배우자인 김숙희씨가 낡고 작은 텔레비전을 큰맘 먹고 바꾼 날, 이 의원이 그걸 전혀 몰라보더란다. 서운함을 내비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집에 들어오면 당신밖에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해.” 10년 전 <국회보>에 실렸던 내용이다. 총리 시절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보여준 언변과 더불어 온라인 게시판에서 화제가 되었다. 만약 머리 모양을 바꿨는데 못 알아봤으면 ‘당신 눈동자밖에 안 보인다’ 했을 것, 심쿵 사랑꾼, 실력은 집에서부터 갈고닦았다 등의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말발로 치자면 이렇듯 ‘역대급 순발력’을 가진 그가 요새 계속 ‘모호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당권 도전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않고, 앞서 기본소득 논쟁이나 윤미향 의원 관련해서도 똑떨어지는 의견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논의와 점검이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 “엄중히 보고 있다”는 식의 신중한 표현으로 일관했다. 현안에 말을 아끼는 기색이 역력하다.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날에도 “극히 유감”이라며 “엄정한 대처가 필요하다”고만 했다.

일각에서는 차기 대선 지지도 1위이니만큼 ‘부자 몸조심’ 하는 것이라고도 평한다. 논쟁을 피한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대체로 싸움을 붙이고 싶거나, 싸우고 싶어 하는 이들이 하는 소리다. 왜 그가 매사 답을 내놔야 하는가.

그는 이제 총리가 아니다. 당대표도 아니다. 국회의원이자 민주당 코로나19국난극복위원회 위원장일 뿐이다. 국정이나 당정을 좌우할 결정권과 집행권이 없는 처지에서 별말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당연하다.

그는 누구보다 ‘선’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 권한의 범위를 잘 가늠하고 최대치를 해온 편이다. 도지사 시절 별명은 일을 많이 하는 ‘이 주사’였고 총리 시절에는 깐깐하게 현안을 살펴 ‘이테일’ ‘AI 총리’로 불렸다. 자세와 성정을 보여주는 일화는 많다. 지난해 가을 태풍 ‘미탁’ 피해를 본 강원도 삼척을 찾은 자리에서 주로 노령층인 이재민들의 형편을 고려해 약부터 챙겼다. 강원도 고성 산불 피해도 규모에 견줘 서둘러 복구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염려와 닦달 덕분이다. 현장에서 피해자 거주지가 곧 마련된다는 공무원 보고에 정확히 얼마가 걸리느냐를 다시 따져 물어 ‘2주’라는 답변을 받는 식이다. 총리가 할 수 있는, 행정이 할 수 있는 ‘위로’는 바로 이런 것임을 보여줬다. 수해 복구 중인 장병들 한명 한명에게 90도 폴더 인사를 하고, 유세 중 만난 쑥 파는 할머니가 1만원어치 이상을 퍼 담자 슬쩍 돈을 더 꺼내 안 보이게 접어서 쥐여준 모습은 덤이다. 직접 소통에도 능하다. 개인 누리집이 있던 시절에는 게시판에 일일이 댓글을 달았다. 지금도 핵심 메시지나 의견은 간결하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다. 소통은 목욕처럼 스스로 해야 한다는 ‘SNS 목욕론’을 편다.

그에게는 벼락같은 운명이나 거대한 사명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공복의 성실함과 겸손함이 무서우리만치 도드라진다. 기를 쓰고 자신을 그렇게 연마한 티가 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에게서 안정감을 얻는다. 슈퍼히어로가 세상을 구하는 시절은 지났다. 그런 시절은 사실 없었다. 우리 스스로 특정인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염원했을 뿐이다. 간절함의 무게 때문에 상처도 크고 옹호 논리도 매서웠다. 이낙연에게는 그런 팬덤이 없다.

농사짓던 그의 아버지는 “쟁기질할 때 뒤돌아보면 소가 날뛴다”고 했단다. 소를 안 보면 소도 쟁기도 제대로 나아가지 않으니 농사를 망친다는 뜻이다. 정치에서는 지지세력, 응원단, 진영을 신경 쓰는 일이 바로 뒤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 그에게 핵심 지지층이 없다거나 당내 세력 기반이 약하다는 따위의 말은 그리 ‘엄중하게’ 가닿지 않을 것 같다. 덕분에 ‘오버’하지도 않을 것 같다. 다행이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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