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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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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만 남기고 사라지는 유령

⑭ 목숨 잃은 가족의 복수를 위해 떨리는 손을 다잡고 당긴 방아쇠
저격수 쩐반남 이야기
등록 2014-04-14 13:38 수정 2020-05-03 04:27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뿌린 삐라. 앞면에는 베트콩 활동을 하다 전향한 응웬반탕의 사진이 실려 있고, 뒷면에는 베트콩들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그의 편지가 적혔다. 2000년 11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나온 자료다. 미국의 관련 문서에 따르면 삐라에 나온 응웬반탕은 1967년 8월 체포됐다(왼쪽 첫 번째 두 번째 사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 또 다른 삐라들. 오른쪽 위 삐라엔 “가족을 생각하세요”라고, 오른쪽 아래 삐라엔 “베트콩 전사들이여! 당신이 무기를 숨기고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공무원이나 군인에게 신고하면 당신에게 전쟁은 끝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런 삐라들을 무수하게 읽었다는 쩐반남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뿌린 삐라. 앞면에는 베트콩 활동을 하다 전향한 응웬반탕의 사진이 실려 있고, 뒷면에는 베트콩들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그의 편지가 적혔다. 2000년 11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나온 자료다. 미국의 관련 문서에 따르면 삐라에 나온 응웬반탕은 1967년 8월 체포됐다(왼쪽 첫 번째 두 번째 사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 또 다른 삐라들. 오른쪽 위 삐라엔 “가족을 생각하세요”라고, 오른쪽 아래 삐라엔 “베트콩 전사들이여! 당신이 무기를 숨기고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공무원이나 군인에게 신고하면 당신에게 전쟁은 끝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런 삐라들을 무수하게 읽었다는 쩐반남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왔다.

드디어 왔다. 몇 시간을 기다렸던가. 몸을 마음대로 뒤척이지 못해 얼마나 갑갑했던가. 수풀 속에 엎드린 그는 오른팔로 소련제 AK47 소총을 감아 끌어당겼다. 적의 예상 이동경로 부근에서 매복하는 중이었다. 얼굴엔 고구마 줄기를 짠 물로 검은 칠을 했다. 둥근 갈색 챙 모자엔 나뭇잎을 얼기설기 꽂았다. 소박한 위장술이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한 적들은 길을 지나가기 위해 이쪽으로 다가왔다. 남베트남군 병사 10여 명이었다. 총을 가슴팍에 바짝 붙였다. 방아쇠만 당기면 된다. 옆에 있는 동료 베트콩 2명과 눈빛을 교환했다. 조금 더 기다리라는 사인. 이제 표적이 뚜렷이 보인다. 심장박동 수가 빨라졌다. 소총 가늠자 안으로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숨을 멈췄다. 하나…둘…셋!

예고 없는 총탄, 강력한 공포

1968년 12월 초순의 어느 날 오후였다. 한 달 뒤면 1969년 새해. 베트남 중부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촌 인근 숲 속 나무 밑에 엎드린 쩐반남(24)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그는 스나이퍼, 즉 저격수였다. 미군과 한국군, 남베트남군을 향해 정글에서 예고 없이 불을 뿜던 바로 그 정체불명 총탄의 주인공이었다. 기껏해야 서너 발에 불과하지만, 공포는 강력했다. 짧고 굵은 총성과 치명적 타격을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유령. 저격수들은 베트남전이 비정규 유격전임을 실감케 해주는 강력한 존재였다.

악!

명중이었다. 비명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남베트남군 한 명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순간의 소리가 생생하게 잡혔다. 부상자를 향해 다급히 뛰어오는 발소리가 쿵쿵 울렸다. 그들 중 일부는 울음을 터뜨렸다. 망원경을 눈에 갖다 댔다. 총을 맞은 이는 고개를 숙인 채 피를 흘리며 헐떡였다. 저격수도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미안한 감정이 일렁였다.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다.’ 쩐반남 일행은 유유히, 빛의 속도로 저격 장소에서 빠져나왔다. 155cm 키에 깡마른 체구를 지닌 쩐반남의 움직임은 재빨랐다. 남베트남군은 주변을 긴급히 수색했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쩐반남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거처는 산속이 아니었다. 퐁니 서쪽에 위치한 퐁넛촌 넛잡마을에 살았다. 본래 살던 고향집은 1966년 10월6일 미군 폭격에 의해 파괴됐다. 아버지 쩐느억(생년 미상)은 폭격의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쩐반남은 집 근처에 가건물을 대충 지어 살았다. 평소에는 농사도 지었다. 그는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정치선전과 군사활동을 병행하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유격대원(Du kich tap trung)이었다. 정치선전이란 북베트남군과 남부 해방군의 전투 성과를 은밀히 또는 공공연하게 퍼뜨리는 일이었다. 호찌민의 생애와 독립정신을 전파하기도 했다. 쩐반남과 달리 산에서 생활하며 조직적으로 군사훈련을 하고 전투작전을 펴는 베트콩은 정규군(Linh chinh quy)이라는 이름으로 구분해서 불렀다.

퐁넛은 거의 베트콩들의 해방구였다. 퐁넛에서 활동하는 유격대 조직원은 80여 명이나 됐다. 마을 인구는 300명이었다. 퐁넛은 서쪽에 위치한 터라, 동쪽 1번국도를 중심으로 유지되던 남베트남 정부의 행정력이 덜 미쳤다. 여기에 비해 1번국도 주변에 위치한 퐁니는 남베트남 지지자가 더 많았다. 쩐반남이 소속된 디엔안사 베트콩 조직이 퐁니 인구 260명의 정치 성향을 일일이 집계한 결과, 남베트남 지지자의 비율은 60%였고 공산당 지지는 40%였다. 퐁니 주민들 중 젊은 남성의 상당수가 미군과 협력하는 남베트남 민병대원인 점과 무관하지 않았다. 퐁니에서 활동하는 베트콩 유격대원도 20명은 됐다. 쩐반남은 퐁넛에 살면서 퐁니 인접도로를 주 무대로 저격활동을 벌였다.

남베트남군에서 베트콩으로

쩐반남은 집에 오자마자 대자로 누웠다. 저격에 사용한 AK47 소총은 멜빵을 적당히 조여 옷걸이에 걸었다. 긴장이 풀리자 몸이 노곤해졌다. 눈을 감았다. 남베트남군 병사가 토하던 비명의 여운이 귓전을 맴돌았다. 긴 한숨이 터졌다. 집에는 자신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폭격에 비명횡사한 사건을 전후로 가족은 한 명씩 저세상 사람이 됐다. 자신보다 먼저 베트콩 활동을 했던 형 쩐방(1937년생)은 1965년 8월 남베트남 경찰에 체포돼 디엔안사 빈디엔 감옥에 들어갔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어머니 응웬티릭(생년 미상)은 아버지처럼 미군 폭격에 희생됐다. 1968년 5월18일이었다. 같은 해 4월11일 큰누나 쩐티록(1934년생)은 마을에 들어온 미군들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유일한 혈육은 작은누나 쩐티항(33)이었지만, 오래전 결혼해 다낭에 나가 살았다. 쩐반남은 불쌍하게 죽은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분노를 충전했다. ‘나는 오늘 무고한 사람을 쏘지 않았다. 복수를 했을 뿐이다. 남부 베트남의 해방과 조국의 통일을 위해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지금은 정반대편에 서게 되었지만, 쩐반남도 한때 남베트남군 병사였다. 만 스무 살이던 1964년 1월, 퐁니·퐁넛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옛 응웬 왕조의 수도 후에의 남베트남군 신병훈련소에 입소했다. 제식훈련을 받았고, 미국제 AR16, AR18 소총으로 혹독한 사격 연습을 했다. 그는 입소 3개월 만에 부대를 탈출했다.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정글로 보내질까봐 불안했기 때문이다.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을 가는 척하다가 부대를 빠져나와 후에 터미널로 향했다. 고향 퐁넛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요금을 내자, 기사는 짐짝 싣는 곳을 가리키며 숨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쩐반남의 행색을 보고 탈영병이라 짐작한 듯했다. 남베트남 전역에서 탈영병이 쏟아져나오던 때였다.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한 달 만에 게릴라들이 있는 산으로 갔다.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형도 베트콩, 친구들도 베트콩이었다. 어릴 적 함께 놀던 여자 동무들마저 베트콩으로 변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학교만 졸업해 많이 배우지는 않았지만, 해방군으로 불리는 그 베트콩들의 노선이 옳다고 확신했다. 쩐반남이 보기에 진실은 복잡하지 않았다. 베트남은 베트남 사람들의 나라였다. 미국의 나라가 아니었다. 미국이 싸움을 건 이상 싸워야 했다. 호찌민이 옳았다. 그뿐이었다.

베트콩이 된 뒤 처음 맡은 임무는 무기 운반이었다. 베트콩의 물자보급선이 지나가는 꽝남성 일대 산에 올라 무기를 받았다. 소총과 실탄은 가방에 넣어 어깨에 둘러메고, 수류탄은 허리에 찼다. 이런 상태로 밤길에 산속을 걷고 또 걸어 다낭의 오행산 부근 비밀 거점까지 갔다. 그 무기로 베트콩들은 꽝남 지역 곳곳에서 미군과 한국군을 괴롭혔다. 4년이 흘렀다. 쩐반남은 이제 주로 저격수 노릇을 했다.

한국군을 빼곤 모두가 동지

저격보다 먼저 한 일은 부비트랩 설치였다. 늘 조마조마했다. 미군이 남기고 간 불발 수류탄 따위를 철사와 연결해 건드리기만 하면 터지도록 숲 속에 고이 모셔놓는 것이었다. 설치를 하다가 폭탄이 잘못 터질 수도 있었다. 적이 다니는 길목에 부비트랩을 설치해놓은 동료 베트콩 한 명이 매설 위치를 내부에 알리기도 전에 목숨을 잃어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쩐반남은 또 대전차 지뢰인 ‘봄바깡’(Bom ba cang)을 설치했다. 이는 한국군의 병력 이동을 지원하는 미군의 수륙양용 장갑차(LVT) 바퀴를 수시로 무력화했다.

비교적 근거리에서 적을 상대하는 저격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물리적 타격을 가하려는 목적이 없지 않았지만, 단지 겁먹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 나를 노릴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힌 상대는 심리적으로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안전한 저격 장소 선정과 정확한 사격, 망원경을 통한 결과 확인, 그리고 신속한 도주가 생명이었다. 자주 훈련을 했지만 매뉴얼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처음 몇 번은 손을 너무 떨어 포기했다. 집중력이 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저격 직후 망원경으로 적의 상태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냅다 도망치기도 했다. 적의 규모를 살펴 저격 여부를 판단하는 일도 중요했다. 함부로 방아쇠를 당겼다간 자멸할 수 있었다. 쩐반남처럼 퐁넛에 거점을 둔 베트콩 유격대원들은 10명 이하의 소규모 병력만을 노렸다. 소대나 중대급 적 병력을 타격하는 것은 산속에 은신하는, 상대적으로 무장 상태가 좋은 베트콩 정규군들의 몫이었다.

쩐반남에겐 남베트남군이 가장 만만했다. 미군과 한국군은 부담스러웠다. 한번은 한국군 해병 분대 규모 병력을 향해 저격을 했다가 혼비백산한 적이 있다. 예상외의 강력한 반격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랬다. 한국군은 가차 없었다. 저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에 들어온 뒤 일대를 쑥밭으로 만들어놓았다. 10개월 전인, 1968년 2월12일.

그날, 쩐반남은 집에서 쉬고 있었다. 오전 11시께 지뢰 터지는 소리 비슷한 것을 들었다. 조금 뒤 퐁니촌에 진입한 한국군들을 목격했다. 중대 규모였다. 쩐반남은 옷걸이에 걸어놓은 AK47 소총을 챙겨 어깨에 메고 잽싸게 서쪽에 위치한 라터마을로 향했다. 걸어서 30분 거리였다. 이럴 땐 숨는 편이 상책이었다.

한국군, 그러니까 해병 제2여단 제1대대 1중대 병력은 그날 퐁니마을을 거쳐 퐁넛마을 초입에 도착했다. 1중대원 중 일부가 퐁니·퐁넛촌 주민들을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마을이 불타올랐다. 쩐반남이 퐁니로 온 건, 서너 시간 뒤 총소리가 잠잠해지고 나서였다.

쩐반남은 뜨악했다. 적이라 할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이 마을에 들어와 구조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 곁에 가까이 가기엔 께름칙했다. 한데 이 순간만큼은 적이 아니었다. 한국군만을 제외하고 모두가 동지였다. 한국군이 남긴 학살의 현장을 미군·남베트남군·베트콩이 함께 수습하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쩐반남은 미군·남베트남 민병대와 멀찍이 떨어져 논을 뒤졌다. 주민들이 벼 사이에 버려진 주검을 찾는 중이었다. 쩐반남도 이를 도왔다. 머리만 남아 있는 주검, 창자가 다 보이는 주검을 보았다. 비명과 울부짖음이 곳곳에서 들렸다. 한쪽에서는 주검을 들것이나 채반 등에 올려 1번국도까지 옮겼다. 그는 팔짱을 끼고 움직이지 않았다. 미군과 한국군이 공공연하게 지나다니는 그곳은 위험했다. 쩐반남은 퐁넛 집으로 그냥 돌아갔다.

누가 또 걸려들 것인가

1968년 2월 한 달간 퐁넛촌에 설치된 마을 확성기에선 “주민 학살을 자행한 한국군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울려퍼졌다. 군중집회에선 마을 주민들이 주동자들의 선창에 따라 주먹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쳤다. “단호하게 구국항미전쟁! 자유독립쟁취! 남부해방 조국통일!” “미군을 물리치고 괴뢰군을 몰아내자.”

학살은 바람처럼 지나갔다. 다시 1968년 12월의 어느 날. 남베트남군 저격에 성공한 지 10일 만이었다. 쩐반남은 AK47 소총을 품고 퐁니 근처 숲 속에 엎드린 채 전방을 주시했다. 누가 또 걸려들 것인가. 미군이냐, 아니면 괴뢰군이라 부르던 한국군 또는 남베트남군이냐.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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