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조는 한 손을 들었다.
그날은 1968년 1월19일 오후였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떠날 시간이었다. 칼바람이 비명을 지르며 몰려왔다. 최저기온 영하 10℃. 체감온도는 2배.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죽일 것인가, 살려줄 것인가. 눈으로 덮인 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법원리 삼봉산 기슭. 그날 새벽 5시에 도착해 남쪽 능선에 진지를 구축하고 쉬던 31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은 거수 투표를 했다. 우연히 조우한 나무꾼 4형제 우희제(30)·우경제(23)·우철제(21)·우성제(20)의 운명이 그들 앞에 놓였다.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6기지 2조 조장 김신조(26) 소위는 한 손을 들었다. 몽땅 처치하자는 쪽에 한 표.
“살려준다, 믿고 나와라”황해북도 연산군 124군 부대를 출발한 지 3일 만이었다. 상부와의 무전 연락도 두절된 상태. 대세는 살려두자는 쪽이었다. 죽이면 누가 꽁꽁 언 땅을 파서 묻을 거냐고 했다. 남조선의 노동자·농민을 위해서 혁명하는 판에 이렇게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죽일 수 없다는 동정론도 폈다. 교육받은 대로, 원칙대로 죽이자는 쪽은 소수였다. 김신조의 의견은 관철되지 못했다. 그들은 투표 결과에 따라 나무꾼 4형제를 살려두고 그곳을 떠났다.
김신조는 두 손을 들었다.
그날은 1968년 1월22일 새벽이었다. 서울의 추위에도 뼈가 시렸다. 최저기온 영하 9℃. 일기예보로는 눈이 온다고 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은평구 홍제동 세검정 계곡 바위 틈새. 얼굴 정면으로 플래시 불빛이 반짝하고 지나가더니 곧이어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나오면 살려준다. 손들고 나와라.” 수류탄 안전핀에 손가락을 걸었다. 교육받은 대로 자폭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또다시 확성기의 외침이 마음을 흔들었다. “살려준다. 믿고 나와라.” 김신조는 두 손을 들고 나갔다.
살고 싶었을 뿐이다. 기로에 선 순간, 아직 꽃을 피워보지 못한 자신의 청춘을 떠올렸다. 군인들에게 체포돼 서울 종로구 효자동 육군방첩부대(방첩대) 사령부로 넘겨졌다. 당일 저녁 방첩대 식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던졌다.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인 23일 오후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한반도 동해상에서 북한 해군에 납치당했다는 무시무시한 뉴스가 들려왔다.
김신조는 이를 앙다물었다.
그날은 1968년 1월28일 오후였다. 경기도 양주군 송추에 위치한 제6군단 CP(지휘사령부). 검은색 오버코트에 노란 머플러까지 멋지게 차려입은 그가 어느 주검 앞에 섰다. 6군단장 이세호 중장이 주검의 얼굴을 지휘봉으로 가리켰다. 김신조에게선 현장을 시찰하는 정부 고위 인사의 포스마저 흘렀다. 불과 1시간 전만 해도 방첩대 조사실에서 수용복 차림이던 그였다. 효자동 방첩대 사령부에서 서빙고동 분실로 이첩돼 조사를 받던 참이었다. 그는 주검이 제124군 6기지 총조장 김종웅(24)이 틀림없음을 확인해주었다. 청와대를 습격하러 함께 서울로 침투했던 김종웅은 김신조와 다른 길을 택했다. 1월26일 새벽 눈 덮인 양주군 광적면 비암2리 애기수 바위틈에서 수류탄을 던지며 끝까지 저항하다 가슴에 2발, 어깨에 1발, 양쪽 다리에 3발 등 총 6발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벌집이 된 김종웅의 육신을 찬찬히 훑어보던 김신조의 얼굴은 굳어졌다. 31명 중 그만 온전히 남쪽에서 살아남았다. 어금니를 꽉 물었다. 투항을 했지만, 전향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적군 포로일 뿐이었다. 이틀 뒤인 1월30일은 설날이었다. 베트남에선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들이 한-미-남베트남 연합군을 향해 대대적인 기습공세를 폈다. 2월1일엔 베트남 파병군인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지어지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수원 간 첫 기공식이 열렸다.
6개월 연장된 군 복무 기간김신조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날은 1968년 2월 초순의 어느 하루였다. 방첩대에서 수사관들은 달콤한 말들을 쏟아냈다. 방첩대장 윤필용 소장은 그를 직접 신문하며 다독였다. 적이었지만 군인정신을 높게 평가해줬고, 식사도 여러 번 같이 했다. 협조가 아니면 죽음이었다. 투항을 넘어 전향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조금씩 흘리던 북쪽 정보와 기밀을 본격적으로 털어놓았다. 남한의 군대를 개조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조언도 해주었다. 자신은 20kg 배낭을 메고 산악지대를 시속 12km로 주파했다고 과시했다. 남한 군대도 유격훈련이 혹독하고 체계적이냐고 수사관에게 물었다. 내처 인민 군대는 10년 복무인데 남한 군대는 지나치게 짧지 않느냐고 말했다. 북한은 전 인민의 무장화로 가는데 남한 사내들은 군 제대 뒤 총을 잡아보긴 하냐고 물었다. 북한 특수부대가 곧 또다시 남침을 준비 중이라는 귀띔도 해주었다.
그날은 1968년 2월7일이었다. 제대 일자를 손꼽아 기다려온 군인들에게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 전 장병 제대 보류! 국방 당국은 김신조가 포함된 북한 무장 특수부대 청와대 습격 기도 사건(1·21 사건),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 등 일련의 긴박한 사태에 대비해 종래의 정례적인 장교 전역과 사병 제대 조치를 보류하기로 한 것이다. 일주일 뒤엔 군 복무 기간을 6개월 늘리는 방침이 발표됐다. 육군과 해병대는 2년6개월에서 3년으로, 공군과 해군은 3년에서 3년6개월로 늘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2월7일 “올해 안에 250만 재향군인 전원을 무장시키고 그에 필요한 무기공장을 연내에 건설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는 4월1일의 향토예비군대 창설로 이어졌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2월에 지원키로 결정한 군사원조자금 1억달러 중 절반이 여기에 사용됐다. 지역마다 예비군 무기고가 설치됐다. 1년 뒤인 1969년부터는 고등학교(주 2시간, 연 68시간)와 대학(주 2시간, 연 60시간)에서 교련 수업이 시작됐다.
김신조는 연일 폭로와 증언을 이어갔다.
1968년 2월, 3월, 4월, 5월, 6월의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방첩대는 보안사(육군보안사령부, 현 기무사)로 이름이 바뀌고, 보안사령관엔 김재규 중장이 임명됐다. 2월 말까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한 달 동안 조사받은 그는 미군 첩보부대 수용소로 넘겨졌다. 통역관이 동석한 가운데 미군에게 수사를 받다가, 국내외 기자들의 인터뷰나 방송사의 좌담 요청이 들어오면 양복을 쫙 빼입고 외출했다. 북한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살 데가 못 되는지를 폭로했다. 남한이 얼마나 발전했고 얼마나 자유로운 곳인지를 ‘간증’했다.
4월27일 오전,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충무공 이순신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동상을 헌납한 박정희 대통령과 3부 요인을 비롯해 유진오 신민당수 등 각계 대표가 참석했다. 이순신 동상은 30평 화강석 좌대 위에 세워진 높이 17m의 청동 주물이었다. 김종필 공화당 의장은 경과보고에서 “백의종군의 높은 뜻으로 왜적을 물리쳤던 충무공 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을 보위해 국토 통일을 성취하자”고 말했다. 갑옷을 입고 긴 칼을 찬 무인의 동상이 수도 서울 도심 정중앙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었다. 충무공은 왜구를 격퇴하듯 ‘북한 무장공비’를 박살내는 군사정권의 수호신이 돼줄 것만 같았다. 동상 건립 총재였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은 한 달 뒤인 5월 이른바 ‘국민복지회’ 사건에 휘말려 공화당 탈당은 물론 정계를 은퇴하고 잠시 외국으로 떠나 있어야 했다. ‘차기 대권’을 꿈꾸었다는 죄였다.
두 달간 게릴라전 벌인 김신조의 후배들김신조는 후배들에게 호소했다.
그날은 1968년 11월의 어느 하루였다. 경북 울진과 강원도 삼척에 북한 특수부대원 120여 명이 침투했다. 김신조는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군용 헬리콥터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헬리콥터는 태백산 일대를 저공 비행했다. 총알이 날아왔다. 김신조는 마이크에 대고 외쳤다. “나 김신조다. 자수하라.” 김신조의 후배인 제124군 2기생들은 울진·삼척 일대에서 두 달간이나 게릴라전을 벌였다. 군경과 향토예비군들이 총을 들고 맞서 싸웠다. 북한 특수부대원들은 7명이 생포되거나 투항했다. 그들은 남한 민간인들을 만나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죽였다. 나무꾼 4형제를 살려주었다가 실패한 1·21 청와대 습격작전의 철저한 학습효과였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도사리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해당한 9살 이승복도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11월21일엔 시·도민증 제도가 폐지되고 주민등록증 제도가 시행되었다. 18살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13자리 번호가 부여되고, 죽을 때까지 이 주민등록증을 휴대할 의무가 생겼다. 1·21 사건 이후, 주민등록법 개정안의 국회 처리가 급물살을 탄 결과였다. 12월5일엔 국민교육의 기본이념이라는 국민교육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선포됐다. 초·중·고등학생들은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로 시작하는 600자짜리 국민교육헌장 전문을 달달 외워야 했다. 일부 학교에선 학생들이 그 전문을 완벽하게 외울 때까지 집에 보내주지 않았고 체벌을 가했다.
김신조는 자유를 얻었다.
그날은 1970년대 초반의 어느 하루였다. 울진·삼척 침투 사건 선무공작 참여 등의 공로로 1968년 11월 초순 미군 첩보부대에서 서빙고 보안사 분실로 다시 옮겨진 그는, 1970년 4월10일 풀려났다. 처음엔 남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술을 자주 마셨다. 롯데백화점 건너편 명동의 칠성클럽이라는 곳에 갔을 때였다. 무대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맥주를 마시다가 화장실에 갔다. “너 김신조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뒤에서 누군가 물었다. 얼결에 “예”라고 대답하자 욕설과 주먹이 한꺼번에 날아왔다. “쌍놈의 새끼, 너 때문에 군대 생활 개피 쏟았어, 이 개새끼야.” 술에 취한 김신조도 가만있지 않고 대들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뜯어말렸다.
1968년은 대한민국 병영화의 기틀이 마련된 해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은 1948년 8월15일이지만, 군사정부의 진정한 수립은 김신조가 청와대 앞까지 내려온 1968년 1월21일로부터 시작됐다. 사회 각 부문의 군사체제·군사교육을 위한 인프라가 착착 깔렸다. 베트남 전선에 투입된 5만 대군이 미국으로부터 군사비를 뜯어오는 가운데, 현역 복무 기간 연장과 향토예비군 창설, 교련 실시 등을 기본으로 하는 군대식 시스템이 사람들의 일상에 더욱 깊이 뿌리내렸다.
모든 것은 박정희 때문이기도 했다이 모든 것은 김신조 때문이었나. 아니다. 그럼 김신조를 보낸 북한 때문이었나. 1967~68년 남북한 간의 군 교전 횟수가 이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지만 전부 북한의 선제공격은 아니었다. 남북 간 충돌의 최소한 3분의 1은 남한 정부의 도발이었다. 1967년 9월3일께 국군 특수부대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의 시설을 공격했고, 그해 11월에는 역시 12명의 국군 특수부대가 북한으로 넘어가 인민군 사단 본부를 폭파했다는 미군 기록이 있다. 박정희에겐 지속적인 ‘위기’가 필요했다. 주한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서였다. 군사정권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사실 이 모든 것은 박정희 때문이기도 했다. 1968년은 베트남 반전운동을 고리로 혁명의 불꽃이 세계 도처에서 타오르던 해였다. 베트남전에 참가해 미국과 남베트남 편에 섰던 대한민국의 1968년은 불꽃이 일렁이는 암흑이었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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