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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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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지 마, 피곤해

⑥ 밴스 미국 특사의 4박5일 한국 방문
독 오른 박정희와 호랑이들을 진정시켜라
등록 2013-12-14 13:14 수정 2020-05-03 04:27
1968년 2월11일치 에 실린 2월7일 유엔군 쪽과 북한의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 관련 사 진. ‘무장공비 침입 사건’을 의제로 공개리에 열렸다. 이 회담 2시간 전 푸에블로호 승무원 송환을 위한 북-미 4 차 회담이 비공개로 열려 한국 쪽을 분노케 했다. 왼쪽 기 사엔 한국 쪽의 분노가 담겨 있다. 국회도서관이 소장 중 인 이 신문 사진의 북쪽 대표 편엔 ‘공산도당’이라는 파란 색 스탬프가 찍혔다. 국회도서관에 들어오는 외국 신문엔, 북한은 물론 북베트남 정치인이 실린 사진에도 ‘괴뢰도당’ ‘북괴도당’ ‘공산도당’이라는 스탬프가 찍히던 시절이었다 (왼쪽). 1968년 2월11일 사이러스 밴스 미국 대통령 특사 의 내한 첫날 기자회견. 당일 오후에 박정희 대통령을 만 나고 싶어 했지만 한국 쪽은 일요일이라는 이유로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밴스 특사는 박정희가 소망하던 ‘대북 공격’을 막아내고 2월15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겨레 자료, 1969보도사진연감-한국기자협회

1968년 2월11일치 에 실린 2월7일 유엔군 쪽과 북한의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 관련 사 진. ‘무장공비 침입 사건’을 의제로 공개리에 열렸다. 이 회담 2시간 전 푸에블로호 승무원 송환을 위한 북-미 4 차 회담이 비공개로 열려 한국 쪽을 분노케 했다. 왼쪽 기 사엔 한국 쪽의 분노가 담겨 있다. 국회도서관이 소장 중 인 이 신문 사진의 북쪽 대표 편엔 ‘공산도당’이라는 파란 색 스탬프가 찍혔다. 국회도서관에 들어오는 외국 신문엔, 북한은 물론 북베트남 정치인이 실린 사진에도 ‘괴뢰도당’ ‘북괴도당’ ‘공산도당’이라는 스탬프가 찍히던 시절이었다 (왼쪽). 1968년 2월11일 사이러스 밴스 미국 대통령 특사 의 내한 첫날 기자회견. 당일 오후에 박정희 대통령을 만 나고 싶어 했지만 한국 쪽은 일요일이라는 이유로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밴스 특사는 박정희가 소망하던 ‘대북 공격’을 막아내고 2월15일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겨레 자료, 1969보도사진연감-한국기자협회

“컨스트럭티브!”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서울 중구 장충동에 위치한 국빈 전용 숙소 영빈관. 정일권 국무총리가 주재한 만찬이 끝나가고 있었다. 검은색 더블브레스트 오버코트에 엷은 브라운색 모자를 쓴 훤칠한 키의 미국인이 만찬장을 빠져나가려고 출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기자들이 무언가 질문을 쏟아냈다. 미국인은 잠깐 서더니 짧게 몇 마디 답했다. 그러고는 바로 대기 중인 승용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던 기자들의 뇌리엔 그 말만이 남았다. “컨스트럭티브!”

‘1·21 보복 포격’ 재가 요청한 한국

베트남 퐁니·퐁넛촌에 한국군이 들어온 그날이었다. 마을이 불타던 그날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이 주검을 수습하던 그 시간이었다.(지난 연재물 참조) 1968년 2월12일 밤 9시께. 주요 정계 인사들이 참석한 대한민국 영빈관 만찬장에도 보이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불을 끄러 온 소방수였다. 신중해야 했다. 고르고 고른 말이 “컨스트럭티브”(건설적). 무엇이 어떻게 건설적이라는 말인가.

기자들과 맞닥뜨린 미국인은 사이러스 로버츠 밴스(51)였다. 린든 존슨 대통령의 명을 받고 온 미국 정부의 특사. 서울 방문 이틀째. 정신없는 하루였다. 이날 아침부터 한국 쪽 인사들과 무려 4시간이 넘는 회담을 했다. 아침 9시15분에 최규하 외무장관, 9시30분엔 정일권 국무총리, 그리고 10시엔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청와대 회담 자리엔 다 모였다. 최규하 장관, 정일권 총리를 비롯해 김성은 국방부 장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미국 쪽에선 윌리엄 포터 주한 미 대사, 본스틸 주한유엔군사령관, 월츠 국무성 비서실장이 동석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미 양국의 인사들은 ‘한국의 안전보장’ 문제를 협의했다. 오후에 잠시 쉬고 저녁 7시부터 영빈관 만찬이 시작됐다. 다음날도 아침 10시부터 정일권 국무총리와의 제2차 고위급 회담이 예정돼 있었다. 이날 저녁 만찬장 출구에서 기자들이 던진 질문은 청와대 회담에 관한 것이었다. 무슨 내용이 오갔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는 내심을 비칠 수 없었다. “디스트럭티브”(파괴적)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는 회담 내내 ‘파괴 행위’를 요구했다. 나중에 공개된 포터 대사의 편지에 따르면, 그날 박정희는 1월21일 청와대를 공격하려다 미수에 그친 북한 특수부대의 근거지를 포격하자고 했다. 최소한 북한이 다시 도발했을 때 보복공격을 하겠다는 최후통첩이라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입장에선 전혀 건설적인 제안이 아니었다. 밴스 특사는 이를 거부했다.

예상한 일이었다. 박정희를 비롯해 한국 쪽 인사들은 독이 바짝 올라 있었다. 밴스 특사는 2월10일 낮(한국시각) 케네디공항에서 한국으로 떠나는 미 공군기를 타기 전부터 그 상황을 알았다. 는 그가 “한미진통의 진정제를 담은 가방을 들고 왔다”고 표현했다. 2월11일 아침 한국의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얼어붙은 날씨보다 더 싸늘한 분위기가 손님을 맞이했다. 공항에는 달랑 진필식 외무차관과 이범석 외무부 의전실장만이 나왔다. 대통령은 고사하고 장관조차 한 명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다. 는 이를 ‘냉대’라고 썼다. 도착 당일 청와대 방문을 희망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아무리 중요한 회담이라 하더라도 일요일에 국가원수를 방문할 수 있느냐”며 거절했다. 대신 박정희는 청와대경호실 지하사격장에서 부인 육영수 여사와 소총과 권총으로 사격 연습을 했다.

“쿠바 공비가 백악관 습격했어도…”

박정희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던 나날이었다. 빈정이 극도로 상했다. 시간대순으로 살펴보자. 1월21일 밤 10시 북한의 무장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기도했다. 일국의 대통령 모가지를 노렸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무모한 적대 행위였다. 1월23일 오후 1시45분엔, 강원도 원산 앞바다에서 작전 중이던 미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의 위협을 받고 납치당했다. 문제는 미국의 반응이었다. 1·21 때는 가만히 있더니, 푸에블로호 납치 때는 전쟁을 치를 것처럼 난리를 피웠다. 미국은 동해상에 핵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와 핵잠수함을 배치했고,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 중이던 전투기 비행대를 전북 군산과 경기도 오산 공군기지에 배치했다.

박정희는 포터 대사를 만나 이렇게 다그쳤다. “대한민국의 안전상 북괴 유격대 침입 사건이 미함 납북 사건보다 더욱 중대한 위협으로 고려돼야 할 것이다.” 허사였다. 미국은 한술 더 떴다. 남한을 쏙 빼놓고 북한과 푸에블로호 사건 해결을 위한 비밀접촉을 한 것이다. 결국 2월2일부터 유엔군 쪽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스미스 장군과 북한 쪽 수석대표 박중국 사이에 첫 판문점 회담이 시작됐다. ‘비밀회담’이었다. 1·21 사건 무시→푸에블로호 사건 호들갑→북한과의 판문점 비밀회담으로 이어진 일련의 미국 태도는 박정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미국의 베트남전에 5만 대군을 파병한 그가 이렇게 취급받을 수는 없었다. 존슨도 이 지점에서 찔렸다.

밴스는 한-미 간의 냉기류를 풀 적임자로 선택됐다. 그는 예일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였다. 1961년부터 케네디 정부 아래서 국방부 장관 고문, 육군 장관, 국방부 차관을 지냈다. 1967년 디트로이트 인종폭동과 키프로스 위기(그리스-터키 분쟁) 때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 분쟁조정가로서, 존슨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8년 뒤인 1976년 12월엔 지미 카터 정부 아래서 키신저 후임으로 국무부 장관에 오른다. 케네디·존슨·카터 등 세 명의 민주당 대통령 아래서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그는 우선 외모에서 먹혔다. 최강 동안이었다. 한국 신문들은 “50대이지만 30대의 홍안을 지녔다”고 썼다. 동안과 홍안에다 착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의 행보를 보도하는 한국 신문의 기사 문장엔 호의와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지병인 척추장애가 있지만 장시간의 회담에도 전혀 피곤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묵묵히 한국 쪽 인사들의 말을 경청하더라고 했다. 실제로 그는 많이 들었고 적게 말했다. 12월13일 국회에서의 대화록을 보자. “먼 거리 여행에 얼마나 피곤했느냐.”(이효상 의장) “비행기 안에서 푹 쉬었다.”(밴스) “쿠바의 무장공비가 백악관을 습격했다면 미국 국민들은 얼마나 격분했겠느냐?”(이효상 의장) “….”(밴스) “푸에블로호 사건 때 미8군에 비상경계를 내렸는데 공비 사건 때는 왜 안 내렸는가.”(박준규 외무위원장) “….”(밴스) 한국 쪽 인사들은 밴스 앞에서 미국을 비판하고, 그가 쩔쩔매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끼며 어느 정도 화를 누그러뜨렸는지도 모르겠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비밀의사록

밴스 특사 제1의 임무는 박정희의 ‘대북 무력 보복’을 막는 것이었다. 그가 한국에 오기 10여 일 전인 2월2일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은 포터 대사에게 “한국 정부가 실질적으로 충분한 양의 군사적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2월6일엔 한국 쪽 인사들이 포터 대사와 본스틸 유엔군사령관을 중앙청으로 불러 “미국이 만족할 만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모종의 중대 결의를 행동으로 옮길 것”이라고 했다. 2월7일엔 미국의 대북 유화 정책을 비난하는 한국인들의 데모가 번졌다. 임진강 자유의 다리 앞에서 시위하던 경북 금릉 기드온신학교 학생 300여 명에게 미군이 M16 소총을 발포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존슨 대통령은 “박정희가 원하는 대북 군사 보복은 북한에 말려드는 꼴”이라고 봤다.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북한의 잇따른 공격은 베트남전 지원 차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에 이어 벌어진 북베트남과 베트콩들의 ‘뗏 공세’(구정대공세, 1월31일)는 그 심증을 굳히게 했다. 미국 본토는 베트남전 반대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으로 시끄러웠다. 베트남전과 긴밀하게 연결된 북한이라는 폭탄을 살살 다뤄야 했다. 납치된 푸에블로호 선원 83명의 생명이 위태로웠다. 베트남과 한반도라는 두 개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릴 수는 없었다. 그해 12월엔 미국 대통령 선거까지 예정돼 있었다.

존슨의 박정희 달래기가 시작됐다. 2월8일 한국에 대한 1억달러의 추가 군사원조를 의회에 요청했다. 한국 방위를 위해 항공기·대공 장비, 해군 레이더, 초계함, 탄약 및 그 밖의 군사장비를 구입하는 데 쓰라는 돈이었다. 포터 대사를 통해선 박정희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했다. 다음날인 9일에 밴스 대사를 한국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다시 밴스 특사의 2월13일 국회 모임. 왜 미국이 푸에블로호 사건 때만 미8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느냐고 따지던 박준규 외무위원장이 농담을 던졌다. “우리가 호랑이처럼 보일지 모르나 마음만은 모두 비둘기들이다.” 밴스 특사는 덕담으로 응수했다. “한국 사람이 말하는 호랑이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모두 비둘기 같다.” 그의 입에선 착한 말만 나왔다.

밴스 특사는 서울 중구 타워호텔에서 2월14일 밤을 꼬박 새웠다. 최규하 외무장관과 함께 성명 초안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2월15일 아침 마침내 한-미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언론들은 ‘안전 위협엔 즉각 협의’ ‘연례 국방 각료급 회담 추진’ ‘국군 현대화 촉진’ 등을 굵은 제목으로 뽑아 보도했다. 박정희가 공동성명에 넣기를 원했던 ‘보복’이라는 말은 일절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한국 언론들은 “한국 방위를 위한 미국의 확고한 결의와 그 구체적인 방법을 다짐하는 비밀각서 또는 합의의사록을 작성해 교환했다”고 보도했다. 실제 그런 비밀의사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밴스 특사는 합의한 적이 없었다. 박정희가 자신의 체면과 국내 여론을 의식해서 일방적으로 창조해낸 가공의 합의였다.

박정희의 전성기였다. 원하는 걸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미국에 ‘갑’ 행세를 시늉이나마 할 수 있었다. 1964년 베트남전 파병 이후 한국과 미국은 최고의 밀월기를 구가 중이었다. 1967년 6월8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정희는 여당의 3분의 2 자리 확보를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3선 개헌 통과 정족수를 채웠다. 미국은 침묵했다. 박정희 개인에게 황홀한 기회였다.

“재떨이로 영부인과 참모들 때린다더라”

밴스 특사는 2월15일 오후 특별기편으로 미국에 돌아갔다. 미국에 간 그는 한국에서의 4박5일에 관해 무어라 말하고 다녔을까. 한국에선 박준규 국회 외무위원장을 향해 “한국 사람들이 다들 비둘기 같다”고 했지만, 나중에 밝혀진 방문 보고서에 따르면 전혀 다른 뉘앙스의 말을 했다. “한국 인종 중에는 ‘백조’도 별로 없고 ‘매’도 별로 없으며 대부분 ‘호랑이’ 같아 보인다.” 존슨 대통령을 만나서는 이런 말도 했다. “박 대통령이 한국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가 듣기 원하지 않는 바를 말하려 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술을 심하게 마시고 있다. …그는 위험하고 불안정한 사람이다. 박 대통령은 종종 재떨이로 영부인과 참모들을 때린다고 한다.”

영부인과 참모들만이 피해자가 아니라는 게 비극이었다. 대한민국은 이상하게 개조되기 시작했다. 1인 천하를 꿈꾸던 박정희 입장에선, 대단히 ‘컨스트럭티브’한 1968년의 활주로가 펼쳐졌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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