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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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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왜 베트남 아닌 청와대로 왔을까

② 1ㆍ21 기습과 투이보 학살…충격과 공포의 청와대 습격,
그 하루 전날
주월 한국군의 어떤 습격
등록 2013-10-18 14:20 수정 2020-05-03 04:27

탕!
운명의 총소리가 휴일 서울의 밤거리를 충격과 공포로 물들인 것은 밤 10시께였다. 탕, 탕, 탕, 쾅. 총성과 폭음은 주변 인왕산과 북악산에 부딪친 뒤 긴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졌다.
1968년 1월21일. 일요일이었다. 중앙텔레비전(KBS)과 동양텔레비전(TBC)의 마지막 프로그램도 끝난 시간. 집에서 라디오를 듣던 이들은 볼륨을 줄이고 창문 틈새로 밖을 살폈다. 안방에서 잠을 청하던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건넌방 가족들을 깨웠다. 세종로 아카데미극장에서 9시부터 시작된 신성일·김지미 주연의 (감독 김기) 마지막 회를 보던 관객은 11시쯤 밖으로 나와서야 사태를 감지했다. 총성은 12시 통금시간이 지나서도 울렸다. 맹추위가 한고비를 넘긴다는 대한(大寒). 영하 9℃. 그날 서울 시민들은 기온과 관계없이 얼어붙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 청와대 500m 앞까지 육박한 북한군 특수부대</font></font>

‘공비’가 나타났다. 그냥 공비가 아닌 ‘무장공비’였다. 신문들은 ‘살인간첩’()이라고도 했고 ‘살인유격대’()라고도 불렀다. 수도 서울의 청와대 500m 앞에까지 쳐들어왔다. 인원은 무려 31명. 나중에 밝혀진 그들의 정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6기지 특수부대원들이었다. 1월16일 오후 2시 황해도 연산군 기지본부를 출발해 18일 밤 서부전선 미2사단 철책을 뚫고 꽁꽁 언 임진강을 건너왔다고 했다. 파평산~미타산~앵무봉~노고산~비봉의 산줄기를 타고 마침내 북한산 사모바위에서 세검정 쪽으로 이날 저녁 내려온 것이다. 짙은 회색 신사복 코트에 흰 고무줄을 두른 검은색 농구화 차림. 코트 속엔 권총과 기관단총, 수류탄, 실탄을 넣어 허리께가 볼록했다. 청와대를 공격해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 등 정부 요인을 살해하고 차량을 탈취해 북으로 돌아가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다다다다.
굉음이 베트남 농촌마을의 아침을 흔들었다. 중부 지역인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터사 투이보촌(이 연재물의 주 무대인 퐁니·퐁넛과 같은 현이며, 서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두 대의 헬리콥터가 마을 초입인 고소이 지역에 내려앉았다.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으로 들판의 키 작은 모들이 춤을 췄다. 모내기 시즌이었다. 1968년 1월20일 오전 10시. 헬리콥터에서 군인들이 내렸다. 한국군 해병 제2여단의 소대 규모 무장 병력. 대열을 정비한 그들은 투이보촌을 향해 걸어 들어왔다. 해병 제2여단은 한 달에 걸쳐 인근 호이안으로 주둔지를 옮기는 중이었다. 새 주둔지 정착을 위해 꽝남성 일대에서 ‘비룡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산자락을 타고 서울로 넘어온 북한의 무장 특수부대원들이, 서울 도심 진출을 하루 앞두고 비봉에서 밤을 새우던 시각이었다.

1968년 1월21일 첫 총격전 현장인 서울 종로구 청운동 도로변에 세워진 고 최규식 종로경찰서장 동상. 오른편 아래에 월계관을 쓰는 남자와 비둘기 등이 조각돼 있다(왼쪽). 그 하루 전 발생한 베트남 꽝남성 투이보 마을 사건 현장에 세워진 희생자 추모 위령비. 오른편 아래에 어린아이를 죽이는 한국군의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오른쪽).한겨레 고경태

1968년 1월21일 첫 총격전 현장인 서울 종로구 청운동 도로변에 세워진 고 최규식 종로경찰서장 동상. 오른편 아래에 월계관을 쓰는 남자와 비둘기 등이 조각돼 있다(왼쪽). 그 하루 전 발생한 베트남 꽝남성 투이보 마을 사건 현장에 세워진 희생자 추모 위령비. 오른편 아래에 어린아이를 죽이는 한국군의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오른쪽).한겨레 고경태

다시 서울의 1월21일 밤. 첫 총성이 울리자마자, 최규식(38) 종로경찰서장이 쓰러졌다. 같은 경찰서 소속 김경수 순경 등의 검문 요구를 뿌리치고 세검동에서 청운동 쪽 청와대 방향으로 가던 북한 특수부대원들은 “신분을 밝히라”는 최규식 서장과 실랑이를 벌이다 총격전을 시작했다. 현장에서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은 최 서장은 경찰병원으로 이송 중 숨졌다. 뿔뿔이 흩어지던 특수부대원들은 세검동 쪽에서 전조등을 켜고 내려오던 원효여객 소속 서울 1234호 등 시내버스 4대에 수류탄을 던졌다. 청운중학교 3학년 김형기(17)군을 비롯한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했다. 청와대 습격은 실패했다. 각자 살길을 찾아 튀어야 했다. 민가 골목으로 숨기도 하고, 북한산 쪽을 향해 달리기도 했다. 전두환(37) 중령이 지휘하는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 병력은 조명탄을 쏘아올렸다. 서울의 밤하늘이 대낮같이 밝아졌다. 도망자들은 곤혹스러웠다. 군경의 추격전은 1월28일까지 서울을 넘어 경기도 고양·파주·포천 등지로 확대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 “청와대 까부수고 박정희 멱 따러 왔수다”</font></font>

다시 베트남의 1월20일 아침. 한국군 해병대원들은 투이보촌으로 진입해 들어오며 마을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피신만이 살길이었다. 응웬티니(53)는 세 살배기 외손주를 업고 집 안 동굴로 들어갔다. 군인들은 집집마다 들이닥쳐 동굴을 수색했다. 발견되면 총을 쏘거나 수류탄을 던지거나 즉각 나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기어나가면 총을 맞았다. 응웬티니는 동굴 안에 웅크려 있다가 외손주의 두개골이 산산조각 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녀도 총을 맞고 기절했다. 턱 아랫부분과 혀 반쪽이 날아가버렸다.

군인들은 무언가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들 화가 났는지, 왜 그렇게나 무리한 화풀이를 했는지는 모른다. 작전 중 어디에선가 저격을 받았을까. 그 저격범의 근거지가 투이보촌이라는 증거라도 잡았을까. 그날 투이보촌 주민 145명이 희생되었다.

다시 대한민국. 전국은 증오로 들끓었다.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을 쫓는 과정에서 제6군단 15연대장 이익수(46) 대령이 심장에 기관단총을 맞았다. 22명의 장교와 사병이 전사했다.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희생자는 30명에 이르렀다. 북한 특수부대원 대부분도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대원 31명 중 29명(또는 28명)이 죽었다. 최초 현장에서 체포됐던 김춘식은 치안국에 끌려와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교전 중 화염방사기에 그을려 타죽거나, 목이 날아가고 다리가 잘린 채 최후를 맞은 대원도 있었다. 1명(또는 2명)은 월북했다. 2조 조장이던 김신조(26) 소위만 유일하게 투항했다. 1월22일 새벽 2시30분 서울 홍은동 뒤편 숲 속에서 잡힌 김신조는, 당일 저녁 7시 육군 방첩대 식당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청와대 까부수고 박정희 멱 따러왔다”는 말이 걸러지지 않은 채 전파를 탔다. 대통령 박정희는 대로했다. 방첩대장 윤필용(41)은 20사단장으로 좌천됐다. 9개월 뒤엔 맹호부대장에 임명돼 베트남으로 떠났다. 방첩대장엔 김재규(42) 육군 6관구사령관이 임명됐다.

하루 사이 대한민국 서울과 베트남의 투이보 마을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두 사건을 단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두 사건의 희생자 수를 대조하며 누가 더 죽였고 누가 더 잔혹했는지를 따지는 일은 여기서 적절하지 않다. 그저 두 사건의 인과관계를 주목할 뿐이다.

한국군 전투부대는 1965년 10~11월에 처음 베트남 땅을 밟았다. 수도사단(맹호부대)과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이 갔다. 이듬해인 1966년 4월엔 제9사단(백마부대)이 갔다. 2개 사단과 1개 여단으로 5만 명에 이르는 군단급 규모였다. 한국군은 중부 5개 성(칸호아·푸옌·빈딘·꽝응아이·꽝남)에서 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게릴라(베트콩)들을 상대로 수색·소탕 작전을 벌였다. 곧바로 명성을 드높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 존재감 속엔 ‘민간인들의 두려움’이 포함되었다. 1966년 2월26일 빈딘성 따이선현 고자이마을에서 주민 380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맹호부대원들이 다녀간 뒤였다. 1966년 이런 사건은 베트남 중부 곳곳에서 비일비재했다. 2년 뒤엔 투이보촌 사건이 벌어졌다. 그 한 달 뒤엔 퐁니·퐁넛 사건이 터졌다.

조선노동당 제2차 당대표자회의가 끝난 다음날인 1966년 10월13일의 .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을 지지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조선노동당 제2차 당대표자회의가 끝난 다음날인 1966년 10월13일의 .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을 지지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대활약’을 벌이던 1966년이었다. 10월5일부터 12일까지 평양에서는 조선노동당 제2차 당대표자회의가 열렸다. 1275명의 대표가 참석한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진영의 통일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단결 회복’을 강조했다. 대표자회의는 마지막 날 ‘월남 문제에 관한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의 성명’을 채택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 서로 짠 것처럼 움직인 북한과 북베트남</font></font>

“미 제국주의자들이 윁남(월남)에 대한 침략전쟁을 확대하고 있는 형편에서 사회주의 진영, 국제공산주의 운동, 로동운동, 민족해방운동을 비롯한 전세계 반제력량은 굳게 단결하여 미제를 단호히 반대하고 윁남 인민의 투쟁을 적극 도와야 한다. (중략) 미 제국주의자들이 이미 30만의 침략 군대와 수만 명의 추종 국가 및 괴뢰들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남부 윁남과 사회주의 나라인 윁남민주공화국을 침략하고 있는 조건에서 사회주의 나라들은 미제 침략자들에게 집단적 반격을 가하여 침략의 마수를 꺾어버려야 하며 싸우는 윁남 인민을 지원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힘을 다하여야 한다. 사회주의 나라들이 윁남에 지원병을 보내는 것은 응당한 일이다.”( 1966년 10월13일치)

‘월남 인민을 지원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힘을 다하여야 한다’는 성명을 채택한 이후 북한의 대남 무장공세는 극심해졌다. 실제로 1968년 10월3일 유엔군 사령관이 유엔에 보낸 보고서는, 남북 간의 중요 사건 발생 수가 1965년 69건, 1966년 50건에서 성명 채택 이듬해인 1967년 566건으로 갑자기 10배 뛰었다고 밝히고 있다. 1968년에는 더 뛰어 1~8월까지만 해도 661건이었다. 남북 간 교전 횟수도 1965년 29회, 1966년 30회, 1967년 218회, 1968년(1~8월) 356회로 비슷한 증가 추세를 보였다.

북한은 1967~69년 북베트남에 가해지는 미군의 공중 폭격에 맞서기 위해 전투기 조종사와 미그기를 보냈다. 베트남 일간신문 의 2007년 8월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북베트남에 87명의 조종사를 파견했고 14명이 전사했다. 지상군을 파병했다는 기록은 없다. 대신 매해 5만 명의 병력이 베트남으로 빠져나간 한반도 남쪽을 향해 공격 수위를 대대적으로 높였다. 박정희에게 베트남이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는 제2전선이었다면, 김일성에겐 한반도가 베트남전의 제2전선이었다.

결국 1월21일의 청와대 공격은 ‘남조선 혁명’ 공세의 하나이자, 베트콩 측면 지원 목적을 동시에 띤 인민군 정예부대의 ‘베트남전 참전’이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실제로 하루 전인 1월20일 북베트남군이 북위 17도선에서 가장 가까운 미 해병대 전초기지 케산을 공격하면서 두 달간 혼전 상태가 지속됐다. 1월30일엔 남베트남 전역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기습적인 ‘구정 대공세’를 벌였다. 북한과 북베트남은 서로 짠 것 같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 미국, 박정희의 대북 보복 요청 외면하다</font></font>

결정적 한 방을 노린 청와대 습격 작전은 실패했다. 그래도 ‘반 방’은 ‘성공’했다. 박정희는 사건 한 달 전인 1967년 12월21일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에서 만난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추가 파병 요청을 받고 이를 검토 중이었다. 쉽게 수락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이틀 뒤엔 북한의 미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이 발생했다. 한반도 위기의 해법을 둘러싸고 한-미 관계가 꼬였다. 존슨은 박정희의 대북 보복 요청을 외면했다. 박정희는 이를 갈았다. 거대한 해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color="#C21A1A">월남 & 베트남: </font>월남(越南)은 베트남의 한자식 표기다. 북한 신문은 러시아식 표기에 따라 ‘윁남’으로 적었다. 북베트남은 북위 17도선 위에 있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남베트남은 같은 선 아래에 있던 베트남공화국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군의 참전(1964~73년)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 정부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소련과 북한은 북베트남 정부를 도왔다. 월맹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모체가 된 호찌민의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의 한자식 이름인 ‘월남독립동맹’의 약칭이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 신문들은 ‘월맹’과 ‘북베트남’을 구분 없이 썼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은 남베트남 정부에 저항하는 남부 베트남의 정치·군사 단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미군은 이들을 경멸하는 어조로 비엣공 또는 비시(Viet Cong·越共: 베트남 공산주의자)라고 했는데 한국인들에게는 ‘베트콩’이라는 발음이 익숙하다. 1975년 4월30일 북베트남 군대의 사이공(현재 호찌민) 함락으로, 남베트남은 세계지도에서 사라졌다. 남북 베트남은 1976년 통일돼 현재의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탄생했다.</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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