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금융기관장 자리를 신호탄으로 본격적인 공공기관 인사 태풍이 몰아닥칠 태세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리만큼 정권 인수 기간과 임기 첫 한 달을 인사 참사 등으로 허송세월해버린 박근혜 대통령으로선 정책 주도권의 고삐를 뒤늦게 죄기 위해서라도 세간의 관심을 다른 데로 몰아갈 필요성을 느꼈을 법도 하다.
5년 전 이맘때, 정부의 영향력 아래 놓인 금융기관을 비롯한 주요 공공기관장 인사를 앞두고 “10년을 굶었다”는 우스갯소리를 해대는 사람이 많았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 세월을 거치며 ‘힘깨나 쓰는’ 자리에서 소외됐다는 하소연이었다. 심지어 집권세력의 핵심 지역기반인 대구·경북(TK) 출신 인사들 가운데는 “예전엔 전화 한 통화면 은행장들이 다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줬는데, ‘우리 사람’이 없다보니 참 힘들더라”는 고충(!)을 거침없이 털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거친 벌판에서 10년 세월을 힘겹게 지냈노라는 얘기가 얼마나 진실에 가까울지 의문이겠지만, 어쨌거나 권력과 자리에 대한 그들의 ‘허기’는 거침없는 ‘먹성’으로 돌변한 걸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지난 정부 내내 공공기관 및 그 산하기관 주요 보직 인사를 둘러싼 잡음이 유독 컸던 데는, 2007년 대선이 사실상 일찌감치 승패가 갈린 ‘원 사이드 게임’이었다는 점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승패가 뻔한 게임이었으니 이기는 쪽에 줄을 댄 사람도 그만큼 많았고, 결국 그럴듯한 자리로 보상받으려는 후보자도 많았다는 얘기다. 대규모 물갈이 인사를 앞두고 ‘시장’에 나온 ‘구직자’가 많을 때, 으레 해법은 두 가지뿐이다. ‘회전 속도’를 높이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거나. 통상 연임을 허용하던 자리를 단임으로 바꾸는 게 전자의 해법이라면, 단지 해당 기관뿐이 아니라 그 자회사와 계열사를 넘어 말단 협력업체에까지 정권에 줄을 댄 사람을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건 후자의 해법이었으리라.
특정 정부의 성패를 평가할 때, 최고 권력자를 둘러싼 몇 개의 동심원을 그려보는 게 내 오랜 습성이다. 최고 권력자를 중심으로 첫 번째 동심원을 이루는 건, 정권의 최고 핵심 실세들이다. 청와대와 행정부의 핵심 요직을 꿰차거나, 외곽에서 비선라인을 주무르는 이들은 최고 권력자와 정치적 생사를 같이하는 운명공동체다. 이들보다 좀더 큰 궤도를 그리는 동심원엔 정권을 떠받치는 관료·정계·재계·학계 등 각 분야 엘리트들이 두루 포진해 있다. 정권 내내 청와대와 행정부, 공공기관 등 주요 자리를 돌아가며 맡는 이들의 수는 아마도 수백 명에 이르지 않을까. 이들 바깥에는 전국 각지에서 ‘권력과 친분을 유지한 채’ 이런저런 이권에 개입하는 친정부 성향의 인사들로 짜인 또 다른 동심원이 있다. 그간의 경험에 따르자면, 솔직히 이들은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국정철학’을 단기속성코스로 익힐 수 있는 ‘권력형 산업예비군’에 가깝다.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자리가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에 이른다고들 한다. 나만의 셈법으로 따져본다면, 그 범위는 최소 두 번째 동심원에서 최대 세 번째 동심원까지다. 이명박 정부에서 첫 번째 동심원을 그렸던 인사들은 대부분 권력형 비리에 연루돼 감옥신세를 졌다. 두 번째 동심원에 포함됐던 인사들은 도덕성은 물론이려니와 업무능력과 시대정신 면에서 역대 어느 정부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다. 그리고 이들에 줄을 댄 세 번째 동심원 속 사람들은 4대강 사업과 미소금융 사업 등 다양한 이름으로 포장한 채, 가히 물 만난 고기처럼 우리 사회를 각종 이권과 비리의 무대로 흐려놓았다.
어느 기업인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던가. 박 대통령 입장에선 (임명할) 자리는 많고, (자리에 앉혀야 할 사람은) 더 많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역대 정권을 불문하고 변치 않는 진리는, 최고 권력자와 가까운 거리의 동심원이 타락할수록 그 바깥의 동심원은 더 빠르게 무너져내린다는 사실, 곧 무서운 ‘승수효과’다. 임기를 ‘인사 참사’로 시작한 박 대통령의 다음 행보에 유독 눈길이 가는 이유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영상] “국민이 바보로 보이나”…30만명 ‘김건희 특검’ 외쳤다
“윤-명태균 녹취에 확신”…전국서 모인 ‘김건희 특검’ 촛불 [현장]
해리스-트럼프, 7개 경합주 1~3%p 오차범위 내 ‘초박빙’
에르메스 상속자 ‘18조 주식’ 사라졌다…누가 가져갔나?
로제 아파트는 게임, 윤수일 아파트는 잠실, ‘난쏘공’ 아파트는?
거리 나온 이재명 “비상식·주술이 국정 흔들어…권력 심판하자” [현장]
노화 척도 ‘한 발 버티기’…60대, 30초는 버텨야
“보이저, 일어나!”…동면하던 ‘보이저 1호’ 43년 만에 깨웠다
이란, 이스라엘 보복하나…최고지도자 “압도적 대응” 경고
구급대원, 주검 옮기다 오열…“맙소사, 내 어머니가 분명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