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정치적인 반정치
매우 평범한 내용에 ‘감동’을 받는 사람이 나오는 ‘중도’ 후보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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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출사표’를 던졌다. 1년 가까이를 ‘간 보는 이 순간, 촬스’라고 불리며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를 애태우던 그 문제적 사내의 출사표는 ‘추상적이고 상징적이며 또 수사적‘이었다. 그렇게 정말 미치도록 정치적이었다. 하지만 그 사내가 그 정치적 문장으로 점철된 출사표를 던지자마자 대선 레이스 전체가 일순간에 웜홀을 통과했다.
안철수 전 원장의 대선 출마 선언은 ‘가장 정치적인 반정치’ 선언이었다. 구체성을 찾아보기 힘든 그의 문맥은 박근혜 후보가 읽었다 한들 어색하지 않을 것이었고, 문재인 후보가 발표했어도 무방할 내용이었다. 하지만 소구력은 천지 차이다. ‘혁신’을 외치지 않는 현실 정치인은 없고, 가식의 정치를 하겠다고 말하는 정치인도 없으며, 뺄셈의 정치를 하겠노라 선언하는 정치인은 있을 수 없다. 흑색선전을 하며 불의의 정치를 하겠다고 말하는 정치인은 아예 세계사를 통틀어 단 한 명도 없었다.
안철수의 선언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매우 정치적인 표현에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감동’이란 걸 받았고, 호사가들은 정치의 문법을 허물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 기이한 현상은 2012 대선이 ‘가장 정치적인 반정치’의 도전을 받아내야 한단 점을 보여준다.
1987년 이래 모든 대선은 ‘중도의, 중도에 의한, 중도를 위한’ 선거였다. 그 유명한 ‘보통 사람들’(노태우)이란 슬로건을 시작으로 ‘신한국 창조’(YS), ‘준비된 대통령’(DJ), 그리고 가장 최근의 ‘국민성공시대’(MB)까지. 노무현 전 대통령 정도를 제외하면 대통령이 된 이들의 슬로건은 항시 중도를 겨냥해왔다. 시대적 굴곡과 변곡점에 따라 중도를 호명하는 부감은 조금씩 달랐지만, 어찌됐건 대선 때만 되면 후보들은 목 놓아 중도를 불러왔다.
그렇게 한국 정치에서 ‘중도’는 일종의 성역이었고, 때가 되면 여야 가릴 것 없이 언제나 전면화하는 노선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우린 진짜 중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언제나 첨예한 진영 대결에서 ‘나는 어느 편인지’를 스스로 짜맞춰야 했다. 그간 한국 정치의 스펙트럼은 유권자의 성향을 1에서 10으로 나눈다면 양극단의 3을 점한 이들이 가운데를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게임이었다. 우리 편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상대를 허물어 중간을 점해야 이길 수 있으니 언제나 ‘중도’가 애달팠다.
하지만 안 전 원장은 “국민의 반을 적으로 돌리면서 통합을 외치는 것은 위선”이라고 말했다. 안 전 원장의 정치는 중간을 먼저 점하고 양극단을 향해 투 트랙으로 역진하는 형태다. 선거 슬로건으로서의 중도가 아닌 정치적 실재로서의 중도를 증거하는 첫 사례다.
김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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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전 원장의 출마 선언은 어떤 대선 후보의 것보다도 스펙터클했다. 왜냐하면 스펙터클하게 여겨지지 않게 잘 치장된 스펙터클이었기 때문이다. 스펙터클은 무엇인가 화려한 느낌을 주는데, 안 전 원장의 출마 선언은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 다른 후보들과 차별화되는 무대를 그는 만들었다. 실내에서 출마 선언을 기획한 것도 상당히 흥미롭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와 타임스퀘어에서 출마 선언을 했던 후보들과 상징적인 선을 그은 것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요인이 토크콘서트였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역시나 그는 자신의 주특기를 잘 활용했다. “제가 희망을 드린 것이 아니라 제가 오히려 희망을 얻었다”는 표현에서 그는 다른 후보와 차별성을 드러냈다. 자신을 낮추고 국민을 드높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출마와 정치 쇄신을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다른 후보들과 달리 집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 굳이 대통령이 되지 않더라도 정치 쇄신에 일정하게 기여할 수 있다면 족하다는 뜻이다. 그동안 구축해온 안철수의 이미지에 걸맞은 내용과 형식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대통령 후보 안철수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무후무한 정치 실험이라는 호들갑도 없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본다면 안철수처럼 혜성처럼 나타난 후보가 당선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방한한 이매뉴얼 월러스틴도 지적했듯, 미국의 경우 기성 정당과 무관하게 무소속으로 출마해 주지사에 당선된 사례가 없지 않다. 정당정치의 기원지라고 할 유럽에서도 선거 때마다 새로운 정당이 빈번하게 탄생한다. 말하자면 안철수 현상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라기보다, 오히려 민주주의 체제로 한국 사회가 편입되었기에 발생하는 보편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안철수 후보’의 출현으로 상황은 ‘낡은 정치 대 새로운 정치’라는 구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진보 대 보수’, 또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이념 구도가 대체돼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안철수를 야권 후보 중 한 명으로 보고 ‘박근혜 대 문+안’ 구도를 생각했던 이들에게 당혹스러운 결과가 앞으로 펼쳐질 공산이 크다. 출마 선언에 앞서 광주 5·18 묘역을 다녀오고, 출마 선언 이후에 현충원을 방문해 박정희와 박태준 묘역을 참배했다는 사실은 박근혜 후보의 국민통합 행보를 머쓱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물론 안 원장이 박 후보와 대립각을 세웠다고 해서 문 후보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구도가 민주당에 정치 쇄신이라는 요청을 압박해 민주당이 상응하는 결과를 보여주지 못할 경우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낡은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박 후보와 문 후보는 정당정치에 얽매여 있지만, 안 원장은 자유롭다. 정당의 존재가 반드시 대통령 선거에 유리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안철수 현상 자체가 그 정당정치의 불완전성에서 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해주는 대목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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