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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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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만 청소년의 300만 표심을 잡아라

준성인 12~18살에게 절반의 투표권을 준다면…청소년 공략에 나선 의원들의 허풍 공약 아이디어
등록 2011-07-07 18:13 수정 2020-05-03 04:26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도대체 이게 무슨 터무니없는 제도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에게 투표권을 준다고. 뭐? 열두 살부터 열 여덟살까지의 청소년은 준성인이니까, 한 표는 못 주더라도 반 표씩은 줘야 한다고? 세상 말세야, 말세.” 어느 노인단체 회원이 국회 큰식당이 떠나가라 소리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귀를 뚫어버리려는 듯…. 그런데 그 누군가는 바로 옆에서 2500원짜리 백반을 야무지게 먹고 있는 허풍선 의원이었다. 소속 정당도 후원자도 없어 항상 쪼달리는 처지인데, 그래도 의원이 된 덕분에 시중가의 1/3로 식사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여기며.

“이봐! 밥이 넘어가나? 바로 6년 전에 ‘청소년 반표권’을 상정해서 어영부영 통과시킨 게 바로 자네라고. 그 제도로 벌써 두 번째 국회의원 선거를 하고 있는 거잖아.” 앞에서 타박을 하고 있는 것은 제 1야당의 중진으로 최근 당권 경쟁에 나선 갑중해 의원이었다. 그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선거에서 청소년 표를 끌어들일 복안을 찾다가 이렇게 허풍선 의원에게 자문을 얻으러 온 것이다.

코 묻은 반표를 위하여

허풍선은 바닥을 싹싹 비우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저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구요. …. 투표권 연령을 낮추는 게 세계적 추세라서 안을 만들어봤는데, 그게 날치기 때 섞여서 통과되어버렸잖아요. 당시 우리나라가 19세부터 투표권을 주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1970년대에 대부분의 서부 유럽 국가, 미국, 필리핀 등이 18세 투표권을 시행했죠. ‘군대에 갈 수 있으면 투표도 할 수 있다’라면서요. 사실 오스트리아, 브라질, 쿠바는 16세부터 투표권을 주고 북한만 하더라도 17세부터…”

“아, 됐어! 하여간 중학생부터 투표를 한다고 나서니, 선거 전략이 엉망진창이야. 자네가 이렇게 만들었으니 어떻게 대책을 좀 마련해보라고.” 갑중해는 보좌관이 가져다준 녹차빙수를 허풍선 앞에 내려놓고 숟가락을 꽂아주었다.

“사실 요즘 아이들은 예전과 달라요. 10대 아이돌 그룹 몸 좀 보세요. 성장이 빨라서 기럭지와 볼륨이 장난 아니에요. 중학생 정도만 되어도 어른들이 힘으로 어쩌지 못하잖아요. 게다가 선배님 당이 비정규직을 잔뜩 만들어놔서 청소년들이 여기저기서 값싼 알바를 하고 있고…. 앱 개발이다, 프로게이머다, 한류 스타다 해서 중소기업보다 잘 버는 10대도 있고…, 그게 다 납세원이죠. 그리고 말이에요. 애들도 이 나라 장래가 걱정되지 않겠어요? 초고령 사회다 어쩌고, 나중에 할아버지·할머니 수발을 자기들한테 다 맡길 태세인데… 대학 나와도 일자리 하나 마련하기 어려울 것 같고….” 허풍선은 숟가락을 쪽쪽 빨았다.

“그래도 애들은 애들이지. 지들이 무슨 국가와 정치와 경제를 알아? 그저 컴퓨터나 좀 다루고, 게임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게 다지.”

“그게 바로 선배님 당이 미래 역점 사업이라고 공약집에 적어놓은 ‘정보통신산업’ ‘문화산업’ ‘한류산업’ 아닙니까? 그리고 ‘영어 공용화’ 운운하는데, 지금 애들이 영어 훨씬 잘해요. 조기 유학에 원어민 교사에….” 허풍선은 킬킬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쨌든 지금은 그 중삐리 고삐리들의 코 묻은 반표가 중요한 거죠?”

“그게 참…, 이 제도 때문에 선거권자가 500만~600만 정도 더 생겼잖아. 반표씩 하면 250~300만 표가 늘어난 거지. 보통 숫자가 아니야. 무서워. 내가 볼 때 청소년 전체에게 표를 주는 건 무리가 있어. 내신 3등급 이상에게만 주든지, 아니면 투표장 앞에서 시험을 치러 통과하는 사람에게만 표를 주든지.”

“어허, 시험을 치르면 선배님 당 지지자들은 무사통과일 것 같아요? 제가 볼 때 국회의원 중에도 커트라인 못 넘을 사람 많아요. 일단 표를 준 이상은 못 뺏어요. 그걸 생각하셔야죠. 선배님 당이 지난 선거에서 참패해 야당으로 미끄러졌는데, 솔직히 초기 대응이 미숙했어요. 청소년이 당연히 보수 여당은 안 찍을 거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든 투표장에 못 가도록 작전을 펼쳤죠. 일부러 투표일을 애들 중간고사 주간에 맞추고, 학교장들을 통해 어려운 숙제를 내게 하고…, 그러면 뭐합니까? 투표에 참여하면 봉사활동 2시간 인정해준다니까, 새벽부터 학원 차량을 타고 와서 단체로 투표하고 갔잖아요. 반대로 지금 여당은 아이돌 스타 공연장, 스타 크래프트 경기장 등 청소년이 몰리는 장소를 집중 공략했죠.”

보수당의 공약, ‘주학’복합 빌딩

“이번엔 제대로 해야겠어. 내가 연예기획사 사장들과 일일이 만나서 지지 서약을 받고 있어. 선거 주제곡도 옛날엔 트로트 일색이었는데, 이제 걸그룹 신곡들로 싹 바꿨다고. 무엇보다 뽀로로를 잡아야 하는데, 이게 북한과 합작이라 우리 당 원로들의 반대가 심하네.” “뽀로로는 너무 연령이 낮아요. ‘마법 소녀’ 정도가 좋아요. 이번에 언니 결혼식에 미키마우스 머리띠를 하고 나와서 춤춘 처제 동영상 보셨어요? 그 노래는 꼭 잡아야 해요.”

갑중해가 노트북을 꺼내 바로 검색한다. “오케이, 처제 동영상이라… ‘처제는 왜 언니가 없을 때만 오는가’ 이건가?”

“어허, 그건 보좌관에게 찾아달라고 하시고요. 공약 이야기 좀 합시다. 제가 ‘청소년 반표제’를 만들었지만, 이게 터무니없다고 말하는 이유가요. 애들 꾀려고 내놓은 공약이 참 가관이에요. 야간자율학습 폐지, 두발 노컷 운동, 청소년 심야 게임 자율화 같은 건 그렇다 쳐요. 등하교 시간에 청소년 버스 전용 노선 운영, 지하철에 청소년 전용석 설치, 각 학교에 체벌 교사 감시대 고용, 학급마다 노래방 시설 설치, 지하철에서 학교까지 야외 에스컬레이터 건설….”

“왜? 너무 실효성이 없나? 노인들이 반대하겠지, 자기들 안 챙겨준다고.”

“그게 아니고요.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죠. 원래 의원님 당이 뉴타운 공약을 적극적으로 내세워잖아요. 이번에는 전국의 중·고등학교 운동장을 없애고 거기에 아파트를 지을 수 있게 하세요. 그리고 그 학교 재학생들에게 우선 분양권을 주는 거죠.”

“좋아, 좋아. 이건 우리 당 토목 노선과도 잘 맞네. 전국 노후 학교 재건축 사업… 이런 쪽으로 해야겠어. 생각해보니 원래 학교 있는 자리가 참 노른자위 땅이야. 거기에 주상복합, 아니 주학복합 건물을 짓는 거지. 지하 3층부터 지상 2층까지는 쇼핑센터, 지상 3층부터 5층까지 초등학교, 그 위에 중학교, 고등학교… 이걸로 재정 마련도 되겠구먼. 아니면 4대강 주변에 빈 땅 많은데 거기로 학교를 다 옮길까? 친환경 수변 학교, 이런 이름으로.” 갑중해는 신이 나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차암 좋겠네요. 홍수 때 방파제 역할도 하고.” 허풍선은 생각했다. ‘하긴 건물 지었다 부쉈다 하는 재미로 정치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요. 요즘 애들 워낙 곱게 키워놔서 표를 주더라도, 부모들 의견에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없지 않잖아요. 그걸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해요. 지금 정확한 통계는 잡히지 않는데, 조기 유학을 떠난 청소년이 몇만 명 되잖아요. 그게 다 유권자예요. 부재자투표하라고 캠페인을 해서 부모들 의견에 따라 표를 찍게 하는 거죠.”

“그것도 좋구먼. 조기 유학 갈 정도면 다 중산층 이상이니 우리 당 지지율이 높을 거고.”

청소년 민생 체험으로 ‘빵셔틀’?

“이건 선배님한테만 털어놓는 건데요. 저는 장기적으로는 전 국민 투표제로 가야 한다고 봐요. 애들 1명당 1표씩 주고 부모가 투표하게 하는 거죠. 그러면 저출산 문제도 싹 해결될걸요?”

“그건 그때 가서 문제고. 이제 발로 뛰어야겠어. 왕년에 노인정 돌아다니던 정신으로, 전국의 청소년정을 훑어야지. 근데 민생 체험 프로그램은 어떤 게 좋겠나?”

“청소년 체험이라면 무엇보다 ‘빵셔틀’이죠! 안 그래도 밥 먹고 났더니 단 게 땡기는데, 여의도에 나가서 오징어 먹물빵 좀 사다주실래요? 참고로 저는 딸기 우유 아니면 안 마셔요.”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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