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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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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 김치를 선택한 당신의 최후

세계 7대 김장김치 사건의 전모… ‘순위 정하는 남자’는 어떻게 세계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몰리게 됐나
등록 2011-11-30 14:42 수정 2020-05-03 04:26

내 이름은 봉선달. 두 달 전 의 표지에 나온 그 남자다. 사진 아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순위 정하는 남자, 혹은 왕 정하는 남자’(Ranking Maker, or King Maker). 는 ‘향후 10년을 결정지을 정보기술(IT) 리더’의 순위표 제일 앞에 나를 올려놓았다. 내 아래로는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와 텀블러의 데이비드 카프가 올망졸망 매달려 있었다. 그래, 꿈같은 기억이다. 지금 나는 영등포구치소의 차가운 돌바닥 위에 앉아 있다. 국선변호인은 내일자 조간에 나올 헤드라인을 알려주었다. “긴급체포, 세계경제 파탄의 주범 봉선달.”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폭풍 리트윗과 함께 시작된 김치 전쟁

» 일러스트 조승연

» 일러스트 조승연

모든 것은 ‘김치’로부터 시작되었다. 2011년 11월, 나는 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경관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트윗을 올렸다. “‘세계 7대 김장김치 선정 공모’에 참여하실 개인, 단체는 11월30일까지 저희 집에 김치를 보내주세요. 심사 뒤 순위를 발표하고요. 심사위원과 점수는 비공개.” 그러곤 쓴웃음을 지으며 낮잠을 잤다. ‘올해는 배춧값이 폭락이라고? 그래봤자 나는 중국산 김치나 찢어먹으며 긴 겨울을 보내야겠지?’

잠에서 깨어나자 난리가 나 있었다. 나의 트윗이 폭풍 리트윗되면서 멘션이 쇄도하고 있었다. “크크, 아이디어 쩌네요. 저 여기 참여하고 싶어요.” “택배비는 당연히 선불이겠죠? 심사비도 챙겨드려야 하는데….” “대박이다. 전화 투표는 당연한 옵션!” 유명 연예인까지 가세했다. “이거 좀 땡기네. 솔직히 홍진갱 김치보다 우리 엄마 게 맛있는데.” 포털 사이트의 ‘요즘 뜨는 소식’에 올랐고, 트위터의 팔로어 수가 미친 듯이 늘어났다. 살다 보니 이런 일이 있구나. 나는 자정까지 트윗을 들여다보다 편의점 알바를 갔다.

다음날 아침,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였다. 맙소사! 집 앞에 택배 아저씨들이 줄을 서 있는 게 아닌가? “저 배달 올 거 없는데… 이게 다 뭐예요?” 택배원들이 합창했다. “김치요.” 뭐야, 정말 김치를 보낸 거야? 주소는 어떻게 안 거야? 나는 낑낑대며 김치 상자들을 방으로 옮겨놓은 뒤, 충전기에 꽂아두고 나갔던 스마트폰을 켰다. 부재 중 전화가 100여 통. 트윗을 켜니 나도 모르게 내 주소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님들아. 김치 보내려는데 도대체 주소는 어떻게 알아낸 거야?” “이런 병신 인증인가? 이런 단체가 자기 주소 까는 거 봤어? 그거 알아내는 것도 경쟁의 일부야.”

전국에서 김장김치가 쇄도했다. 개인이 장난으로 보낸 것도 있었지만, ‘실직자 30명 피눈물 김치’ 하며 이 대회에 사운을 건다는 업체도 있었고, 지자체 차원에서 예선을 거친 뒤에 단일후보로 보낸 김치도 있었다. 심지어 한류 열풍 때문인지 베트남·멕시코·우즈베키스탄에서까지 후보작이 날아왔다. 안 되겠다 싶어, 호소의 트윗을 올렸다. “여러분 지원 공모를 중단해주세요. 냉장고가 꽉 찼어요.” 곧바로 항의 멘션이 쇄도했다. “내 이딴 식인 줄 알았다. 특정 김치 밀어주기냐?” “주최 쪽, 농간농간 열매를 먹었구나. 7대 김치는 미리 선정해둔 거?” “김치는 짜고 맵고, 선정은 짜고 치고.” 미칠 지경이었다. 복도와 계단까지 김치가 쌓였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주요 가전회사들에서 거의 동시에 연락이 왔다. 자사의 김치냉장고를 협찬하겠다고. 나는 고민 뒤에 답을 했다. “특정 회사의 협찬을 받는 것은 애초의 취지에 어긋납니다. 대신 ‘세계 7대 김치냉장고’를 동시 선정할 테니 그 후보작으로 보내주세요.” 모두 흔쾌히 받아들였다.

파워 블로거의 출현

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였다. 인터넷에 무슨 소문이 났는지, 전화 투표를 하겠다는 연락이 밤낮으로 쇄도했다. 일본의 어느 도시에서는 공무원들이 교대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후쿠시마 농축 세슘 김치 최고! 솨~랑해요!”라고 외쳐댔고, 알았다고 했더니 “땡큐!”라고 해야 미션을 완료한 거라며 땡큐를 강요했다. 나는 참다 못해 전화를 끊겠다고 전화회사에 연락을 했다. 그러자 국장이라는 사람이 바로 달려왔다. “아이고 왜 그러십니까? 지금 전화 투표 때문에 요금 수익이 말을 못합니다. 특히 국제전화가….” 나는 화가 났다. “전화 투표는 애초에 없어요. 도대체 어디서 그런 소문이….” 그때 국장 뒤로 미니스커트 정장을 입은 여직원 3명이 헤실헤실 웃으며 나타났다. 국장이 말했다. “투표 응답 서비스는 저희가 해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저희 사무실에서 집계 현황을 파악하실 수 있습니다.”

그때쯤 되니 나도 이 상황을 즐기게 되었다. 김치는 협찬받은 물류창고로 들어갔고, 전화는 예쁜 교환수들이 받았다. 나는 가끔 마음에 드는 냉장고를 열어 김치를 꺼내 라면에 올려 먹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선정일이 다가왔다. 전화 투표의 순위대로 뽑을까, 아니면 내 입맛에 맞는 걸 뽑을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공정성을 기하기로 했다. 후보들의 번호를 적은 종이를 티슈갑 안에 넣고 뽑자. 그래서 혼자 식탁에 앉아 운명의 선택을 하려는 순간… 누군가 현관문의 번호키를 눌렀다. 그러곤 어색하게 꾸민 빨간 볼의 여자가 들어와 식탁 반대편에 털썩 앉는 게 아닌가? “누, 누구세요?” “제 이름은 쥐나, 미~소~쥐나예요.” “뭐, 뭐하시는 분이세요? 현관 비밀번호는 어떻게 안 거죠?” “블로거예요. 파~워~블로거! 맛집, 요리, 패션, 심리테스트… 이제 당신 앞에 배추김치·열무김치·깍두기가 있습니다.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나는 얼떨결에 열무김치라고 했다. “열무김치를 고른 당신… 엉터리 같은 일로 대박을 치려다 골로 가게 되었군요.”

미소쥐나는 수십만 명의 회원을 지닌 동호회를 운영하고 있다며, 이런 일을 자기가 많이 해봐서 아는데 이렇게 주먹구구로 하면 곧 큰일을 치를 거라고 겁을 주었다. “재단을 만들어야 해요. 공신력 있는 듯이 보여야죠. 그리고 후보 선정 과정 자체가 엉망이에요. 무료로 누구나 신청을 하게 했으니 어중이떠중이들이 달려들죠. 이번에 100개 팀만 먼저 뽑고, 2차 투표 이후에는 등록비를 받아야 해요. 그리고 전화 투표 수익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뉴세븐김치스’의 재단 이사장이 되어 있었다. 김치가 질릴 지경이 되자 ‘세계 7대 동지팥죽’ 행사를 시작했고, 이어 ‘세계 7대 설날 떡국’ ‘세계 7대 군대 간 남친에게 주는 초콜릿’ 등의 행사가 이어졌다. 나는 전세계의 여성들이 정성스레 보낸 선물과 편지를 뜯어보는 재미에 그저 해롱해롱해졌다. 편의점 알바를 그만두고도 각지에서 날아오는 물건들로 ‘띵까띵까’ 살아갈 수 있으니 대만족이었다. 재단 운영은 쥐나에게 모두 맡겼는데, ‘뉴세븐김치스’ 사이트가 구글이나 야후 못지않은 접속 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건 기자가 찾아온 뒤였다.

공동구매·로비 쇄도의 결말

영광은 하룻밤, 지옥이 몰아닥쳤다. ‘뉴세븐김치스’에 매달린 전세계 지자체들이 연쇄 도산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미소쥐나가 자매회사로 상업적인 분야를 맡은 ‘뉴쥐나월드코퍼레이션’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순위권에 오른 각종 제품의 공동구매를 독점해 막대한 수수료를 받아 챙기고 있었다. 전화회사와의 공모하에 국제전화 요금을 나누고 있었고, 심지어 후보 단체들로부터 현금 로비를 받은 정황도 포착되었다고 한다. 각종 소송이 밀려들어왔고, 나는 세계경제 파탄의 주범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제3국으로 도피한 쥐나는 내게 다음과 같은 멘션을 보냈다. “열무김치를 선택한 당신. 내가 골로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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