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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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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 예술 집착 공화국을 여행하다

대한민국의 형제국 아리코… 예술 문외한이라면 굶을죽을 각오 해야 하는 위험한 나라
등록 2011-08-18 15:41 수정 2020-05-03 04:26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집 나가면 개고생, 무턱대고 가방 싸면 길바닥에 무덤 판다. 안녕하세요. 세계를 굴러다니며 아찔한 여행 정보를 알려드리는 ‘여행 안전 체험맨’ 나깐죽입니다. 요즘 누구나 가는 해외여행, 열에 아홉은 즐겁게 다녀오시죠? 그런데도 이런저런 사고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몰디브로 신혼여행 갔더니 여행사가 토껴버리고, 한국인 민박이라 마음 놓았더니 주인이 술에 약을 타고, 런던 한복판에서 폭도에게 가방을 털리고… 정말, 트래블이 트러블이 되는 게 한순간인데요. 그래도 말입니다. 저는 이 나라만큼 위험한 곳은 못 본 것 같아요.

<font size="3"><font color="#006699">길거리 밴드에 굽실대는 경찰들</font></font>

나깐죽의 이번 체험 여행지는 ‘아리코 공화국’(Republic of Ariko)입니다. 요즘 가장 핫한 나라라고 하던데… 사실 전 이름도 처음 들어보거든요. 그래서 비행기에서 여행 가이드북 을 들춰봤어요. “아리코 공화국과 대한민국은 형제처럼 흡사하다. 기후나 인종도 거의 같고, 영토의 크기, 인구, 국민소득도 비슷하며, 공용어는 한글이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더군요. “대한민국이 건설업자와 정치인의 천국이라면, 아리코는 오직 예술가들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나라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진짜 낚시였습니다.

입국 심사 때부터 막장이더군요. 심사관이 제 여권 사진을 보더니 인상을 잔뜩 찌푸리는 거예요. “사진을 뭐 이따위로 찍었어요?” “아니 뭐가 문젭니까? 전자여권 만든다고 안경도 벗고 귀도 볼록 나오게 했는데….” 제가 똑바로 보라며 얼굴을 들이밀자, 심사관이 말하더군요. “조명도 엉망이고, 구도도 식상하고, 무엇보다 주제의식이 없잖아요?” 내가 화나서 씩씩댔더니, 뒤에 서 있던 아리코인이 킥킥 웃더군요. “이봐요. 여기는 예술가들의 나라입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죠.” 그 사람이 여권 사진을 보여주는데… 알록달록한 모자를 쓰고 바닷가에서 개폼을 잡고 찍었더라고요. 내가 말했죠. “이건 증명사진이 아니라, 작품사진이잖아요.” 심사관이 말하더군요. “그래요. 작품이 아니면 여권에 붙이지 마요.”

짜증이 확 올라온 상태로 수도 한복판에 있는 화광문 광장으로 갔어요. 겨우 마음이 풀리더군요. 주변 건축물이랑 공원이 눈이 휘둥그레해질 정도로 멋지더라고요. 사방이 잔디밭이고 그 안에 꽃들이 만발한데,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소풍 나온 양 뒹굴거리고… 그거 아마 인조 잔디겠죠? 우리나라에서는 잔디 밟으면 죽는다고 못 들어가게 하잖아요. 그리고 상가 건물에 큰 간판이 하나도 없고, 대중교통 외에는 차량을 볼 수가 없었어요. 이거 평양처럼 조작된 도시에 온 건 아닌가 싶더라고요. 광장 한가운데 혁명 영웅인 예 체바라(Ye Chebara) 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한때 이곳은 경제성장만을 목표로 삼은 삽질 나라였다. 예술가들은 검열에 시름하고 굶주림에 죽어갔다. 이에 시인, 인디 뮤지션, 영화 스태프들의 파업과 무장봉기로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아리코 공화국은 예술가들을 위한 나라다.” 나는 피식 웃었어요. 예술가를 위한 나라,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어?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별 수작을 부리는구먼.

지하철역 앞으로 가니 밴드들이 길거리 연주를 하고 있었어요. 기타 하나 들고 까딱거리는 애도 있고, 갖가지 관악기로 무장한 팀도 있고, 각양각색의 스타일에 실력이 굉장하더라고요. 이런 생각은 들더군요. 이 동네 주민들은 시끄럽다고 항의 안 하나? 아니나 다를까, 록밴드가 공연 준비를 하는데 경찰 대여섯 명이 우르르 달려오더군요. ‘제대로 걸렸군’ 싶었는데, 경찰들이 굽실굽실하는 거예요. “음향장비가 동나서 겨우 구해왔습니다.” 그러더니 앰프를 비롯해 오디오 세팅을 다 해주더군요. 그 와중에 밴드의 드러머는 스틱으로 경찰관 엉덩이를 찌르며 장난치고요. 일개 뮤지션이 공권력을 조롱하다니…, 기분이 확 상하더라고요.

<font size="3"><font color="#006699">신인 예술가에게 군 면제 특혜를</font></font>

못돼먹은 후진국의 본성은 곧바로 드러나더군요. 밴드를 지나 계청천 광장이라는 곳에 들어섰는데…, 맙소사 20~30대 남녀 네댓 명이 알몸인 채로 물장구를 치는 거예요. 게다가 주변 사람들은 앞다퉈 벗은 몸을 촬영해 인터넷에 올리고 있고요. 보다 못해 항의했죠.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이 나라는 공연 음란죄나 음란물 유포죄도 없어요?” 사람들이 멍하니 쳐다보더군요. 저는 우리나라의 훌륭한 제도를 말해주었죠. 대한민국에선 인터넷에 셀프 누드만 올려도 삭제 명령이 내려진다. 노래에 ‘술’만 들어가도 ‘청소년 유해 매체물’이 된다. 사람들이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냈어요. “브라보! 내 생애 이런 유머는 처음 들어봐요.” “거의 예술적 경지예요.” 달려든 사람들은 내 옷을 홀랑 벗기고선 찬사의 표시라며 꽃 그림을 잔뜩 그렸어요. 도대체 왜 물감과 팔레트 같은 걸 들고 다니는 거죠?

나는 눈물을 훔치며 분수에서 몸을 씻었어요. 누가 고추에다 깨알 같은 글씨로 시를 적어두었는데 정말 안 지워지더군요. 그때 누군가 병을 건네줬어요. “세척액이에요.” 병에는 ‘Made in Korea’라고 적혀 있었는데… 반가워서인지 약이 독해서인지,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군요. 저를 도와준 건 아리코 대학교의 경제학과에 다니는 학생이었어요. 그는 사람들의 무례를 용서해달라며 나라가 예술 때문에 미친 것 같다고 울분을 토해냈어요.

아리코에서는 모든 교육이 예술 위주래요. 1인 3악기 연주는 기본이고, 대학 입시엔 음악·미술·영상·문학 과목의 배점이 80%를 넘어요. 답안지는 무조건 손글씨로 작성해야 하는데, 논술에서 적절한 삽화를 직접 그려넣으면 가산점이 부여되죠. 지난 입시 때 한 수험생이 갑자기 시험지를 발기발기 찢으며 퍼포먼스를 했는데, 그 창의성에 감동한 감독관의 추천으로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에 입학했죠. 사회생활도 예술가들에게만 특혜가 돌아간대요. 주요 문학잡지 신인상이나 해외영화제의 상을 탄 사람은 군복무가 면제되고, 예술 관련 소득은 무조건 면세되지요.

온 국민이 예술만 좇다 보니 여러 부작용도 나타납니다. 매년 이사철에는 미술품 대란이 일어나는데요. 가정마다 회화나 조각 작품을 갖추려고 하는데, 우수한 작품은 품귀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죠. 정부에서는 다미술 중과 보유세 등 조처를 취하지만 역부족이죠. 서민들은 유화 월세, 조각 전세 등으로 작품을 빌려서 갖춰두어야 해요. 예술하는 집안에 예술가가 나오기 마련인데 이런 특혜가 대물림되는 것도 큰 문제라고요.

다른 분야의 소외감도 적지 않은데요. 스포츠는 거의 찬밥 신세입니다. 피겨스케이팅·댄스스포츠처럼 예술적 표현력이 가미되는 분야는 상대적으로 대접이 낫지만, 육상·수영 등 단순한 기록경기는 거의 사멸했다고 봐야 해요. 야구와 축구는 점수가 아니라 얼마나 멋진 플레이를 보였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고요. 대규모 조경 예술이라며 골프장을 만든 건축가가 반예술 행위자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목소리 나쁜 정치가는 설 곳 없는 땅</font></font>

저를 도와준 청년은 한시라도 빨리 이 나라를 떠나라며, 저를 설치미술인 양 위장해서 공항에 데리고 가주었어요. 그러면서 세계에 이 나라의 비참한 실정을 꼭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친구인 경제학도는 대학을 나와도 사방이 모두 예술 창작만 하는 곳이니 설 자리가 없어 굶어죽기까지 했다고요. 저는 공포에 질려 그 나라를 떠났습니다. 비행기에 올라탔는데 신문이 보이더군요. 헤드라인 기사는 이랬습니다. “오늘 국립 예술대 총장 우치전씨는 문화관광부 동길홍 장관을 전격 해임했다. 동길홍 장관은 사석에서 ‘국민이 먹고사는 게 먼저지’ ‘예술도 산업이다’라는 엉뚱한 이념을 퍼뜨린 것도 문제지만, 결정적으로 발성이 안 좋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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