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이 있습니다. ‘말은 낳으면 제주로, 사람은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 이제는 진짜 옛말이군요. 지금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부랑자만이 남은 거대 슬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구 1천만 명의 메트로폴리스가 몰락하는 것은 순간이었습니다. 지난해 초여름 몰아닥친 집중호우는 난개발로 위태해진 한강둑을 무너뜨리며 도시의 3분의 1을 수몰시켰습니다. 치명적인 전염병 ‘서울 사스’에 시민의 절반이 감염됐고, 병원과 대형마트로 몰려든 시민들의 폭동이 이어졌죠.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 손든 치안 공백 속에서 수도권 탈출 러시가 벌어졌습니다.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기반을 서울에 집중시켜놓은 대한민국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죠.
지난해 하반기에 ‘신행정수도 선정법’이 통과됐습니다. 과거 헌법재판소는 ‘조선 건국 이래 수도는 서울이었다’는 관습헌법에 따라 수도 이전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으나, 이제 입을 닫고 있을 수밖에 없었죠. 전국의 도시들이 새로운 수도가 되려 입후보할 태세였고, 수차례 공청회를 통해 과거 서울이 겪은 병폐를 막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수도 입후보 도시는 현재 인구 100만 명을 넘지 않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미래지향성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국토 균등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결국 5개로 압축된 후보 도시 중에 한 곳이 다음주 국민투표를 통해 수도로 결정되는데요. 지금부터 각 도시 대표들의 방송 유세를 들어보겠습니다.
중세 고어를 표준어로, 뿌나시
풍광이 아름다운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 뿌리 깊은 나무, 뿌나시입니다. 과거 세종시라는 이름으로 행정 중심의 복합 수도로 뚜렷한 청사진을 내보였고요. 이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뿌나가 되었습니다. 일단 뿌나시는 대한민국의 중심 위치에 딱 놓여 있어요. 전국 어디서나 3시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는 고속도로와 철도망, 그리고 금강을 이용한 수상 교통망까지 구축할 수 있습니다. 과거 경상도, 전라도, 수도권에 집중돼 있던 한국 정치사를 보더라도 충청도에 수도를 정하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또한 뿌나시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의 아름다움을 되살리는 데 앞장서는 문화의 도시입니다. 제가 유세 대기실에서 다른 후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았는데요. 이건 말인지 욕인지…. “아따, 우리 도시가 허벌나게 좋당께요.” “궁디를 주우 차뿔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수도의 시민들이 이런 험상궂은 말을 쓰는 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뿌나시는 충청도 사투리를 쓸 거 아니냐 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시는 세종대왕이 살아 계시던 시절의 한글, 중세 고어를 되살려 새로운 표준어로 되살리고저 합니다. ‘이런 전차로’ 뿌나시를 뽑는 것이 가장 합당한 줄로 아뢰오.
있을 건 다 있고요, 화개시“있을 건 다 있고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시입니다. 한국 정치사의 가장 큰 문제, 그것이 무엇입니까? 동과 서의 지역감정 아닙니까? 그걸 해결하는 방법이 뭐겠습니까? 노래도 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에” 수도를 맹그는겁니다.
화개시는 전통이 살아 있는 청정 도시입니다. 소설 의 중심이 되는 최참판댁을 개조해서 대통령 관저로 사용할 수 있게 해놓았고요. 토지길 주변에 한옥마을을 만들어 각국 대사관을 유치할 계획입니다. 거기에 행정은 물론 교육의 중심이 될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미 청학동 국립대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가 끝났고요. 지리산은 빨치산 활동으로 잘 알려졌듯이 외적으로부터의 방어가 용이한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리고 원래 화개가 장터 아닙니까? 이곳 시민들은 각국의 경제인들을 맞이하는 데 특화돼 있습니다. 닷새마다 벌어지는 화개 오일장 엑스포는 전통 축제와 어우러지는 경제 활성화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하동의 녹차밭, 참게장과 재첩국 등 한식 세계화를 위한 입지 조건까지 완벽히 갖추었습니다. 여기가 딱입니다, 딱이오.
해외 도피 전용 게이트 마련, 영종도 ICN시티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을 이코노미석에 구겨넣고 싶으십니까, 안락한 프레스티지석에 태우고 싶으십니까? 영종도 ICN 시티는 동북아 물류 교통의 허브, 세계 공항 서비스 평가에서 다년간 1위를 석권해온 인천국제공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미래형 신도시입니다.
영종도 ICN 시티는 다른 후보들과 같은 조잡한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영종도와 강화도 사이의 연륙교를 비롯해 주변의 섬을 하나로 연결한 초대형 계획도시. 그 안에 무관세 경제특구를 비롯해 수상레저, 숙박, 위락시설을 갖춘 종합도시. 한마디로 동아시아의 두바이 같은 곳으로, 대통령 관저, 국회의사당, 대법원 등을 모두 공항 건물 안에 지을 예정입니다. 자체 조사 결과, 외국인과 대사관 관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시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저희 시는 이미 고속철도를 비롯한 수도권의 인프라와 긴밀히 연결돼 있습니다. 서울은 무너졌지만 수도권까지 버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더구나 세계 정치와 경제의 주도권이 중국으로 이동해가는 가운데, 우리의 시선은 서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연평도 포격 사건 등을 빌미로 안전성에 위험이 있다, 서해에 쓰나미가 몰려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등 비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해상도시의 핵심부는 초대형 항공모함 내에 설치돼, 유사시에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습니다. 각종 비리나 범죄에 연루된 정치인과 경제인들이 손쉽게 해외로 도피할 수 있는 전용 게이트도 마련해두었습니다.
오징어배 100척의 아우라, 울릉독도시울렁울렁 울렁대는 처녀 가슴처럼 신선하고요, 오징어배 100척의 조명을 켜둔 듯한 광채가 나는 울릉독도시입니더. 수도 이전이라는 거 말입니더. 지역 균형발전 측면에서 가장 소외된 곳으로 정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꺼? 현재 울릉도 인구가 8천 명인데 고마 1만 명만 넘어봤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어서 입후보를 했지예. 저짜 일본에서 자꾸 독도를 지들 땅이라고 우겨대쌌는데, 여그를 수도로 정하면 더 이상 시비를 걸지 못할 거 같기도 하고. 안 그런교?
우리가 섬사람이라고 다들 무시하재? 오징어나 잡던 것들이 나라를 어떻게 굴려, 이캐 쌌고. 아, 우리도 신라에서 쳐들어오기 전에는 우산국이라는 어엿한 독립국가였어. 그라고 인자 세계는 인터넷이니 이런 것 때문에 물리적 거리라는 건 의미가 없어. 우리는 수도가 되어도 청와대, 국회, 이런 거 지을 생각 없어. 바람 좀 심하게 불면 배도 못 뜨는데 여를 어떻게 오노? 대통령도 국회의원들도 지들 집에서 일하면 되고, 업무는 화상통화 같은 걸로 하면 되재. 요새 3G·4G 이런 거 나오는데, 곧 5G도 나오지 않겠는가? 울릉도 하면 오징어, 그러니까 울릉도로 오G…. 하하, 내가 실없구로 와 이라노.
통일을 향해, DMZ시충성! 국민 여러분, 동·서독이 통일됐을 때, 독일 국민은 왜 베를린을 수도로 정했습니까? 그곳이 바로 분단된 독일을 상징하는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은 결국 통일. 그 상징의 도시는 바로 DMZ입니다.
DMZ시는 군사분계선의 철조망을 따라 동해에서 서해까지 이어지는 선형 도시입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모델이지요. 이것은 도시 전체를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도시의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비무장지대 일원 495km의 자전거길 이외에 추가 교통시설 확충 계획은 없습니다. 수도 안에서의 이동은 어렵지만, 지역 어디에서나 수도권의 일부와 접촉하기는 용이합니다. 일부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장감 높은 지역에 수도를 정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는데, 문제의 한 면만 보신 겁니다. 수도 거주민의 99%가 현역 군인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수도 경비에 나설 수 있습니다. 이상 부대 바로 밖에 편의점이 생겼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는 DMZ 근무병이었습니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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