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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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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첨! 시장이 되었습니다

서울시, 추첨 민주주의를 채택하다
자고 일어나니 시장이 된 서민 김순희씨의 “권력이 괴로워”
등록 2011-11-03 12:57 수정 2020-05-03 04:26

지금부터 사건번호 2015-가나다라, ‘서울시장 직무집행 정지 가처분 및 선출 무효 소송’에 관련된 3차 공판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각 언론사 관계자와 방청객들께 당부 말씀 드리겠습니다. 시장 선출 뒤 불과 6개월 만에 제기된 이 기상천외한 소송으로 인해 서울시는 물론 대한민국 전체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여러분의 지대한 관심은 잘 알고 있으나, 지난번 재판에서와 같은 고성과 난동은 절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본 재판장은 재판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하는 어떤 행동도 경비관리대를 통해 제압할 것임을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그럼, 소송을 제기한 원고 앞으로 나오세요.

민주주의의 똥이 된 선거

재판장 원고 김순희, 본인 맞으시죠? 거주지가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서울시장 관사…, 직업이 뭡니까?

김순희 그, 그것이….

재판장 말하세요.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김순희 서울… 시장입니다. 지난 6개월 전부터 서울시장을 맡고 있습니다.

재판장 아, 방청석. 조용히 하세요. 네, 알아요. 알아. 무슨 기분인지 압니다. 서울시장에 선출된 사람이 스스로 직무집행을 정지하고 선출을 무효로 해달라니, 터무니없는 주장이지요. 그래요. 그런 일이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항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순희 시장.

김순희 저년 저거 미쳤네, 싶겠죠.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천한 말버릇을 못 버렸네요. 어쨌든 지난 몇 달간 잠도 못 자고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저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일자리도 못 구해 동대문에서 야식 배달을 하던 가정주부였습니다. 그러던 년이 무슨 흥부 박을 탔는지, 자고 일어나니 서울시장이 되었어요. 얼떨결에 몇 달을 보냈는데…, 이제 정말 아니다 싶어요.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 세상이 좀 잘못됐습니다. 저 같은 것을 시장 자리에 앉혀놓는 이 방식…, 뭐 ‘추첨 민주주의’라고 하나요? 이거 안 됩니다.

재판장 피고 쪽 참고인인 한겨대 정치학과 박윤구 교수, 이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박윤구 원고는 지금, 우리 시대의 중대한 정치적 진화인 ‘추첨 민주주의’를 구시대의 유물인 ‘선거 민주주의’로 돌려놓자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십시오, 지난 서울시장 선거들을. 후보들은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기 일쑤였고, 금품과 조직을 통한 부정선거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300억원 이상 소요되는 막대한 선거 비용도 큰 문제였는데, 어느 시장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담보로 무모한 주민투표를 감행해 보궐선거까지 치르게 했죠. 이에 서울시는 과감히 ‘추첨제 시장선출제’를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반대가 심했지만 곧 가장 효율적인 선출 방식으로 인정받았고, 대한민국의 각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속속 받아들였습니다. 드디어 차기 대통령 선출도 추첨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김순희 이의 있습니다. 제가 배운 건 짧지만 교과서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배웠습니다.

박윤구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었죠. 그런데 열매를 맺는가 싶더니 똥이 되었죠. 민주주의의 기초는 ‘법 앞에 평등’입니다. 선거제도는 그걸 보장해줄 수 없어요. 예전 서울시장 후보 공탁금만 해도 5천만원이었는데, 자기 통장에서 그걸 쑥 빼서 낼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돼요? 몇만원의 가스비도 연체하는 판국에. 게다가 후보 1명당 40억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선거비용을 생각해보세요. 당연히도 서울시장은 부자, 정당 관계자, 일류대 출신 엘리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뭐가 시민의 뜻을 대변하는 ‘대의제’라는 거죠? 지난 선거제도에서 국회의원 중 법조인 출신은 60명이 넘는데, 농민은 고작 1명이었습니다. 행정·입법·사법의 삼권분립이라고요? 그냥 상위권 3개 대학 동창회장이었죠.

기성 정치인이 후보군에서 탈락한 이유

김순희 그래도 시민의 한표 한표를 모은 선거에 의해 뽑아야 대표성을 가지죠. 무슨 블루마블게임 하듯이 ‘당첨, 시장이 되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박윤구 보세요. 투표율이 50%도 안 되고 그중 절반만 지지해도 권력을 차지했어요. 지금은 100% 시민을 후보로 두고 뽑는 100% 시장입니다. 그리고 원래 민주주의가 태어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도 시민 대표자는 추첨으로 뽑았어요. 배심원제도처럼 법관을 추첨으로 뽑는 것도 오랜 전통으로 자리잡아왔고요.

김순희 고대 아테네 같은…? 시민 몇 명 없었잖아요. 성인 남자만 해당됐고…. 어쨌든 서울 시민 1천만 명 중에서 시장을 추첨으로 무작위로 뽑다니 얼마나 위험한 짓입니까?

재판장 피고 쪽, 또 다른 참고인이 있죠? 박상태 중앙추첨관리위원장?

박상태: 네, 재판장님. 대한민국의 주요 선출직 공무원을 뽑는 중앙추첨관리위원회는 과학적 검증 기법으로 후보자를 선별합니다. 먼저 군복무 여부를 철저히 검증하는데, 김순희 시장의 경우 여성임에도 하사관으로 근무해 가점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후보군에 들어가려면 과거 고위 공직자의 고질적 결격 사유이던 부동산 투기, 세금 체납, 위장 전입이 없어야 합니다. 막상 이렇게 범위를 좁히다 보니 기성 정치인들은 거의 후보군에서 제외됐어요. 평범한 서민이 아니면 후보군에 끼기도 어렵게 되었지요. 저희도 처음에는 추첨식 선출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그 과학성과 우수성을 증명할 대표자가 나왔습니다. 바로 저 원고석에 앉아 있는 김순희 시장입니다.

재판장 아, 조용히 하세요. 방청객 여러분. 알아요, 알아. 여러분이 얼마나 열렬히 김 시장을 지키고 싶어 하는지. 그럼, 피고 쪽 대표자로 나온 정우역 부시장.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김 시장이 역대 서울시장 중에서 가장 높은 업무 지지도를 보인다고요.

정우역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전세난 해소에 결정적 기여를 했고, 서민 친화적 교통정책 개선도 높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저희 시장님이 관용차를 거의 이용하지 않으세요. 지난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시장단 회의 때도 차량을 통제하면 본인 마음이 불편하시다고 무역센터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셨어요. 심지어 시장 공관 만찬장으로 이동할 때는 외국 시장들까지 지하철에 태워서 왔죠. 그때 서울 지하철이 너무 편하다며 교통 시스템을 수입하겠다는 곳이 3개나 됐고요. 시장님이 관사가 너무 커서 무섭다며 10개로 쪼개서 임대주택을 만들었더니 각종 관공서와 공관 건물 쪼개기가 대유행을 했죠. 지하철 역사마다 원룸 공간을 만들었고요. 그 때문인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전셋값이 뚝 떨어졌습니다.

김순희 그건 그냥 제가 편해서 한 일인데….

정우역 서민이니까 남들보다 더 큰 집, 더 큰 권력, 이런 게 불편하신 거지요. 시장님이 왜 그렇게 괴로워하시는지는 제가 잘 알아요. 밤낮없이 건설업체, 대기업들이 찾아와서 로비를 하죠. 뉴타운 지구를 지정해달라, 재개발 왜 못하게 하나? 관사 앞에 쌓인 선물 상자들 때문에 겁나서 잠을 못 자겠다고 하시고….

김순희 그러니까 정치는 정치하던 분들이 하시는 게….

1천만 살림을 어떻게 설렁설렁하나요

재판장 됐어요. 그 마음, 나도 알아요. 사실 나도 4년 전까지는 택배원이었어요. 그러다 국민참여재판 추첨으로 5년제 재판관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이런 머리 아픈 일 어떻게 하나 싶었지만, 다 되더라고요. 그냥 군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앞으로 3년만 하면 되잖아요.

김순희 3년6개월입니다.

재판장 ‘레임덕’이라는 게 있거든요. 6개월 정도는 말년 병장처럼 설렁설렁 보내시면….

김순희 어떻게 설렁설렁합니까? 1천만 살림을 하는 건데.

재판장 네, 그 정신으로 살림살이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소송은 기각입니다. 이제 시청으로 돌아가세요.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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