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서 기자 아니오?” 국회의사당 매점 앞에서 캔커피를 마시던 나를 부른 건 허풍선 의원이었다. 나는 캔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아픈 데를 찔러봤다. “의원님 소식은 들었습니다. 다음 선거엔 출마하지 않으신다고요? 임기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어디 자리라도 봐놓으셨습니까?” “자리?” 나는 허 의원이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았다. “의원님은 법조계나 기업체 출신도 아니고, 낙하산이라도 하나 타셔야죠. 다들 공기업 민영화해서 한자리씩 차지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허 의원은 허허 웃었다. “KTX 민영화말이오? 그건 여당의 비대위에서도 반대하는 건데… 나는 좀 다른 걸 생각하고 있소.” “다른 거요?” “철도는 철도인데…. 초고속이 아니고 초저속입니다. 초저속 철도 민영화 법안.” “뭐라고요?” “허허 관심 있으시면 내일 나하고 같이 부산에 좀 내려가봅시다.”
박을 키우는 열차?
다음날 나는 낑낑대며 디지털일안반사식(DSLR) 카메라를 들고 서울역으로 갔다. 전날 저녁 편집장에게 허풍선 의원 이야기를 했더니, 바로 까였다. “정신 차려. 허풍선 그 자식 낚시질에 골로 간 기자가 하나둘이 아니야.” 하지만 이번의 감은 확실했다. 분명히 허풍선이 대형 사고를 치려는 거다. 허 의원은 보좌관도 없이 나와 단둘이 KTX에 올라탔다. “서 기자도 배낭여행 좀 다녔소?” “물론이죠. 제 꿈이 원래 여행작가였습니다.” 허 의원은 가방에서 세계지도를 꺼내 펼쳐 보였다. “여행의 꽃은 역시 기차지. 이걸 보시오. 서쪽부터 보면 유럽은 철도망이 거미줄 같고, 러시아로 넘어가면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있지. 남쪽으로는 이스탄불에서 중동과 인도를 지나 티베트와 중국으로 연결되고… 결국 일본까지 이어져야 이게 대장정이 완성되는 거야. 하지만 이곳과 이곳에서 끊어져 있소.” 철도 지도는 휴전선과 현해탄에 가위 표시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선을 모두 잇는 민영 철도 노선을 계획하고 있소. 일명 유라시아 횡단 비둘기호 사업. 일본에서 출발, 한-일 해저터널을 통과해 남북한을 지나고 시베리아 러시아와 중국으로 이어지는 노선이지.”
KTX가 빠르긴 빨랐다. 허 의원의 장광설을 듣다 보니 어느새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나를 부둣가의 허름한 공사장으로 데리고 갔다. 입구에는 작은 글씨로 ‘유라시아 횡단열차 사업 추진위원회’라고 적혀 있었다. 허 의원은 바다를 향해 삐죽 튀어나온 철도를 가리켰다. “저게 한-일 해저터널을 통해 일본 쓰시마를 거쳐 사가현까지 연결될 거요.” 나는 얼마 전에 쓴 기사가 생각났다. “지금은 항공편을 통한 수송이 대세인데, 터널까지 만들어 철도 노선을 건설할 필요가 있는 겁니까? 저가 항공사들도 경쟁 중이고요.” “허허, 이건 꿈의 한류 열차요. 드라마와 케이팝(K-POP) 한류 팬들이 우리의 주 고객이지. 더불어 일본에는 엄청난 철도 마니아가 있어요. 이 사람들은 미지의 북한 노선을 달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기차에 올라탈 거요.” “그래도 천문학적인 예산이 들 텐데요. 이걸 다 민영으로 만들겠다는 겁니까?” “건설 예산은 거의 일본에서 댈 겁니다. 지금 지진과 핵발전소 폭발 위험이 주는 위기감이 장난이 아니에요. 부유층들은 벌써부터 한국에 집을 사놓으려고 안달이죠. 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나면 비행기도 배도 못 떠요. 그럼 어떻게 넘어올 거요?”
나는 지진에 엿가락이 된 철도가 떠올랐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허 의원은 나를 철도 차량 제작소로 데려갔다. 거기에 괴물체가 있었다. 바퀴가 달린 기와집이라고 해야 하나? “우리 노선은 특화된 관광열차요. 차량의 절반은 이렇게 한옥 구조로 만들었지. 요금제에 따라 초가지붕이 얹힌 차량을 탈 수도 있고. 저쪽으로 가봅시다.” 기가 막혔다. 열차의 초가지붕에 에 나오는 커다란 박이 얹혀 있었다. “설마 진짜 열차 지붕에서 박을 키우는 건 아니겠죠?” “아 당연히 키워야지. 초가지붕은 그게 멋인데.” “열차가 달리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허허, 이 사람아. 우린 초저속 열차라고 했잖소? 박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달리니 걱정 마쇼.” 왜 하필 박일까? 혹시 여당의 지지를 얻으려는 술책일까?
게임에서 지면 아오지 카지노로 직행
색동 한옷을 곱게 입은 승무원이 우리를 안내했다. 전직 KTX 승무원이라고 했다. 해직 문제가 법원에 계류 중인데,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이쪽으로 올 거라고 했다. “손님, 이곳은 저희 한옥 열차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은 온돌 차량입니다. 아, 신발은 벗어 신발장에 넣어주십시오. 온돌형 객차에는 좌석이 전혀 없습니다. 바닥에 뜨뜻한 전기 온돌이 설치돼 있어 아무 데나 편안히 누운 채로 가실 수 있습니다.” 객차 안은 정말 초가집 안방 같은 분위기였다. 심지어 시골 할머니들이 여기저기 앉아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이 객차는 매점과 식당차를 겸하고 있습니다. 저희 유라시아 횡단 비둘기호는 노선상에 있는 모든 기차역에 정차하는데요. 그래서 각 지역에서 바로 캐온 쑥과 냉이, 온돌 바닥에 말린 고추와 곶감 등 우리 농산물을 구입하실 수 있죠.” 허 의원과 나는 온돌 바닥에 앉아 잔치국수를 말아먹었다.
나는 참았던 물음을 그제야 던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노선이 북한을 통과한다고 했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장 어려운 부분 아닙니까?” 허 의원은 꺼억 트림을 했다. “걱정도 팔자구먼. 그건 이미 다 이야기가 돼 있네. 북한은 노선을 제공하면서 적지 않은 사례를 받을걸세. 게다가 그들이 걱정하는 체제의 은폐는 확실히 보장돼 있고.” “그렇지만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사업이 그랬듯이, 남북관계가 바뀔 때마다 언제든지 운행이 중단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허 의원은 이를 쑤시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게 또 매력이지. 비무장지대의 호텔에서 몇 주씩 체류하면서 남북관계가 개선돼 기찻길이 열리기를 기원하는 세계의 여행객들. 이제 판문점역은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는 거야.”
허 의원과 나는 중간 통로를 지나 다음 객차로 들어갔다.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였다. 그곳은 전성기 때의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연상케 하는 유럽식 고급 객차로, 화려한 옷차림의 승객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북한 지역에서 운행될 객차야. 창문은 모두 덧창으로 막혀 있어 바깥 풍경은 전혀 볼 수 없지. 이러면 북한 당국자들도 불만이 없을 거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북한을 달린다는 게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장시간 여행에서 바깥도 볼 수 없다니 지루하기도 할 거고요.” “하하, 그걸 왜 생각 못했겠나? 그래서 이런 이벤트 열차를 만든 거야. 일명 ‘극동 추리 특급’. 바깥을 볼 수 없는 상태로 달리던 기차는 어느 순간 정차하지. 그리고 그 순간 같은 살인 추리 게임이 펼쳐지는 거야. 승객들이 범인을 맞히고 사건을 해결할 때까지 열차는 떠나지 못해. 어때, 스릴 넘치지 않나?” “만약 끝까지 문제를 못 맞히면요?” “그럼 벌칙이 있지. 열차는 아오지로 직행이야.” “뭐라고요? 거기서 노역이라도 하는 건가요?” “아니야. 북한 당국과 협조해서 아오지 탄광에 대규모 카지노를 만들 예정이야. 승객들은 그 안에서 일주일 동안 갇혀 있어야 하지. 자연히 돈을 쓸 수밖에 없겠지?”
오리엔트 특급 비둘기호는 출발하고…
순간 열차가 덜커덩거렸다. 허 의원은 비틀거리는 나를 좌석에 앉혔다. “뭐죠, 이 기차 정말 움직이는 겁니까?” “나는 뭐든 철저하게 하네. 시험 운행도 분명히 해야 되겠지?” “정말 북한으로 가는 겁니까?”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창문이 모두 닫혀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분명하네. 곧 살인사건이 일어날 거야.” 나는 그때 편집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나를 제대로 말리지 않으신 겁니까?
이명석 저술업자
*‘허풍선 의원의 정책개발실’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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