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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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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촛불

여기 한눈에 모든 것을 볼 수 없는 풍광, 촛불의 바다가 있다
등록 2017-02-28 18:36 수정 2020-05-03 07:17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의 실체가 드러나고 분노한 시민들이 촛불을 든 지 어느새 넉 달.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촛불을 보았다. 이를테면 바다와 같았다. 한눈에, 맨눈에 모든 것을 볼 수 없는 풍광. 우리가 보았던 촛불의 풍경은 무엇일까. 우리가 보지 못한 풍경은 무엇일까.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풍경은 또 무엇일까.

그을린 소나무

불에 그을린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박근혜 퇴진 제11차 범국민행동이 순조롭게 마무리되던 1월7일 밤 10시30분, 서울 광화문광장 한구석 소나무가 심어진 작은 정원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사람이었다. 사람이 타오른 불길이었다. 정원스님이었다. “일체의 민중들이 행복한 그날까지 나의 발원은 끝이 없사오며, 세세생생 보살도를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유서로 남긴 글귀였다. “내란사범 박근혜 물러나라”는 외침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을린 소나무 아래 응급처치를 위해 쏟아부었던 식염수병이 나뒹군다. 스님은 이틀 뒤 입적했다. 세월호 참사 1천 일 되던 날이었다.

국가 폭력

그에 앞선 죽음이 있었다. 박근혜 민생 파탄에 맞서 가장 먼저 촛불을 들었던 늙은 농부였다. 백남기 어르신은 2015년 11월14일 민중총궐기 당시 경찰의 진압에 맞서다가 물대포를 맞고 쓰러졌다. 이듬해 9월25일 숨을 거두기까지 317일 동안 사투를 벌였다. 권력은 그의 주검을 칼로 오려 사인을 뒤바꾸려 했지만, 유족과 시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그 와중에 국정 농단이 폭로됐고 권력은 움츠러들었다. 43일 만에 장례를 치렀다. 2016년 11월5일, 제2차 범국민행동이 열리는 광화문광장을 지나 그의 주검은 광주 망월동에 묻혔다. 이번 촛불항쟁 과정에 물대포가 한 번도 난사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백남기 농민이 생명을 다해 막아준 게 아니었을까.

한국을 찍다

팔순의 사진가가 촬영에 열중하고 있다. 일본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4ㆍ19혁명과 한–일 협정 반대시위, 베트남 파병, 6월항쟁 등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누구보다 꼼꼼하게 기록했던 노 사진가에게 이번 촛불항쟁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그는 광화문광장을 여러 번 찾아왔다.

대한문의 아이히만

‘대한문 대통령’으로 알려진 최성영 서울지방경찰청 총경(맨 오른쪽)이 차벽에 올라 촛불집회 진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의 막무가내 진압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대한문 앞 농성 당시 악명을 떨쳤다. 기자회견마저 해산시키기 일쑤였다. ‘대한문의 아이히만’이란 별명을 얻었다. 박근혜의 시절, 총경으로 승진한 건 마땅한 일이었다. 노동자들은 그를 고발했다. 지난 2월9일, 서울지법은 그의 고의적 법 위반에 대해 1200만원 배상판결을 내렸다.

살아남은 아이들

가마니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수줍게 구호를 외치고 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 전두환 독재 시절 이른바 부랑인 단속을 명분으로 국가가 사주한 감금시설 형제복지원에서 500명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 시신은 해부용으로 팔렸다. 구타와 중노동은 일상이었다. 는 그곳의 실상을 폭로한 증언집이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사람 살 만한 사회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마니를 쓰고,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였다. 하지만 두려움이 여전했다.

거리의 노동자

노동자들은 촛불항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거리에 있었고, 여전히 거리에 있다. 회사의 잔혹한 노조 파괴 공작에 맞서 함께 싸웠던 동료가 목숨을 끊자,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거리의 상제가 되었다. 제3차 범국민행동을 하루 앞둔 2016년 11월11일,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동료 한광호의 영정을 들고 청와대를 향해 오체투지했다. 노조 파괴를 사주한 현대자동차를 규탄하며 서울 양재동에서 출발한 지 일주일째였다. 노동자들은 정부청사 앞에서 가로막혔다. 집회 신고 인원을 초과했다는 게 경찰의 어이없는 대답이었다. 바닥에 엎드린 이들의 몸이 얼어붙기 직전에야 경찰은 길을 열어주었다.

세월호 엄마의 카메라

노란 옷을 입은 엄마가 방송차 위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단원고 2학년 4반 임경빈군의 어머니 전인숙씨. 제6차 범국민행동이 열린 2016년 12월3일 세월호 유가족이 촛불행진의 맨 앞에 섰다. 그 참사만 아니었더라면 시민항쟁의 한복판에서 아이들과 나란히 손을 잡고 촛불을 들었을 엄마·아빠들이었다. 아들을 찍고 싶은 ‘엄마의 카메라’가 촛불을 찍고 있다.

촛불꽃처럼

이명박이 그랬던 것처럼 박근혜도 이 촛불의 배후를 캐기 위해 열중이다. 광화문광장으로 올라가는 지하도에서 촛불을 나눠주던 한 자원활동가의 손에 마치 꽃다발이 들린 것처럼 보인다.

내쫓긴 언론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을 말할 때, 언론을 빼놓을 수 없다는 걸 시민들은 알고 있다. 저널리즘의 본령을 지키려던 기자들은 거리로 내쫓긴 채 돌아가지 못했다. 박근혜가 바뀌더라도 언론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시민들은 깨닫고 있다.

매일 촛불

주말에 열리는 대규모 촛불집회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날마다 열리는 ‘매일 촛불’의 징검다리를 건너서 온다.

“범죄자 박근혜”

혁명은 감옥문을 열 때 정점에 이른다 했던가. 2016년 12월15일, ‘광화문 캠핑촌’의 문화예술가와 노동자들은 오랏줄에 묶인 박근혜 조형물을 싣고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를 찾았다. “범죄자 박근혜와 양심수를 맞바꾸자”는 거였다. 촛불을 먼저 들었다는 이유로, 다른 세계를 꿈꾸었다는 이유로, 양심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이들은 아직 이 촛불의 바다를 보지 못했다.

캠핑촌의 함박눈

용산 참사 8주기를 맞은 1월20일,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에 함박눈이 쌓였다. 농성이 길어지며 ‘입주민’의 생활고도 쌓여간다. 어느새 넉 달을 앞두고 있다. 박근혜만 바꾸자고 이러는 것일까. 그자를 바꾸면, 이제 다시 눈물의 촛불을 들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그들에게 요구한 만큼 우리도 대답해야 한다.

사진·글 노순택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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