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늦은 봄날, 밭에서 일하다가 하마터면 너를 밟을 뻔했지. 나는 놀랐는데, 넌 날 보는 둥 마는 둥 느릿느릿 네 갈 길을 가더구나. 오돌토돌 등에 난 독샘을 쓰다듬어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았지. 너를 보면 나도 모르게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네가 알아듣는다면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도 안 뀔, 그런 사람의 노래, 어린 시절 참 많이 불렀던 그 노래. 2025년 경상남도 남해.
언제나 푸른 삶이란 가능할까.
불가능하단 걸 알면서도, 아니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늘 푸름’을 갈망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듦’을 막으려 안달했다. 천하를 가지고도, 결국 시들어야 한다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다행히도 불행히도 자연은 우리에게 늘 푸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일까. 동양이나 서양이나 상록수를 우러르고, 에버그린을 예찬한다. 상록수라는 이름엔 늘 푸름을 향한 갈망이 스며 있다. 시들지 않음의 생리현상을 넘어, 변치 않는 신념과 의지라는 낭만이 배어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한국 사회를 벼랑 끝으로 몰았을 때, 고난을 함께 극복하자며 정부가 틀어준 노래가 무엇이었나.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라는 노랫말의 ‘상록수’였다. 골프선수 박세리의 포기할 줄 모르는 투혼과 낭랑한 양희은의 노래가 어우러진 공익광고는 많은 사람을 울컥하게 했다.
상록수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문학가인 심훈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양반가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피붙이들을 따라 자연스레 친일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지만, 3·1운동을 접하고 옥살이까지 하면서 엉뚱한 길을 택한다. 스무 살에 중국으로 건너가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교우하며 조국 해방을 꿈꾼다. 귀국 뒤 잠시 기자로 일하지만 철필구락부 사건으로 해직되고, 일본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돌아온다. 한편 농촌계몽운동, 이른바 ‘브나로드’를 주도했던 동아일보는 1935년 창간 15주년을 맞아 농어촌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을 공모하는데, 이때 당선작이 바로 ‘상록수’다. 심훈은 최용신과 심재영이라는 실존 인물을 모델 삼아 가난과 무식의 굴레에서 신음하는 농촌으로 뛰어든 지식인 젊은이들의 고군분투와 사랑을 그렸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영신은 아이들을 가르칠 강습소를 짓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영신의 눈물겨운 노력과 아이들의 깨우침에 감동한 주민들이 푼푼이 모은 돈을 내놓고, 일손을 거든다. 어느 날 영신은 아이들과 모래놀이를 하다가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노래 부른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주께 새집 다구~.” 바로 이 대목, 입으로만 전해오던 노래 ‘두껍아 두껍아’가 문자로 등장하는 첫 순간이다.
실존 모델인 여성 독립운동가 최용신은 상록수가 발표된 해에 운명했다. 스물일곱 살, 청춘이었다. “세상 어디를 가보아도 눈에 띄는 계급차별과 빈부격차”를 안타까워한 그가 유언처럼 남긴 글의 제목은 ‘농촌의 하소연’이었다. 마지막 문장이 절절하다. “이 강산을 개척하고 이 겨레를 발전시킬 농촌의 어린이를 길러주소서. 뜻있는 이여! 우리 농촌의 아들과 딸의 눈물을 씻어주소서.” 심훈은 소설 ‘상록수’를 발표하고 이듬해 운명했다. 서른여섯 살, 푸른 나이였다.
헌집들은 헐리고, 새집들은 지어졌다. 두꺼비가 아니라 사람이 한 일이었다. 두꺼비가 살 집까지 죄다 빼앗아 지은 대한민국 부동산 왕국에서 오늘의 백성들은 “저 들에 푸르른… 푸르지오’를 꿈꾸며 하루를 견딘다.
사진·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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