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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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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만약에

등록 2026-05-14 22:01 수정 2026-05-19 14:58
물 밖에 사람이 있고, 물 안에 너희가 있다. 물에 사는 너희는 어쩌다가 ‘고기’로 통칭됐을까. 너희는 사람에게 먹히는 것을 전제로 ‘물고기’라 불리게 되었지. 아무리 크고 넓어도 수족관은 바다일 수 없는데, 우리는 너희가 바다를 헤엄치는 느낌일 거라 우기길 좋아한다. 너희를 가두고 즐길 대단한 권리가 있을 거라 착각한다. 2004년 서울 코엑스 아쿠아리움.

물 밖에 사람이 있고, 물 안에 너희가 있다. 물에 사는 너희는 어쩌다가 ‘고기’로 통칭됐을까. 너희는 사람에게 먹히는 것을 전제로 ‘물고기’라 불리게 되었지. 아무리 크고 넓어도 수족관은 바다일 수 없는데, 우리는 너희가 바다를 헤엄치는 느낌일 거라 우기길 좋아한다. 너희를 가두고 즐길 대단한 권리가 있을 거라 착각한다. 2004년 서울 코엑스 아쿠아리움.


어린이날이었다. 광주광역시의 한 고등학교 인근 도로에서 집으로 가던 여학생이 칼에 찔렸다. 비명을 듣고 또래 남학생이 달려왔다. 칼을 든 범인은 남학생마저 죽이려 들었다. 여학생은 목숨을 잃고, 남학생은 크게 다쳤다. 달아난 범인은 11시간 만에 붙잡혔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사는 게 재미없어 자살을 고민하다 범행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칼을 지닌 채 인적 드문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여학생을 발견하고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홀로 걸어가는 여학생은 만만하고 쉬운 상대처럼 보였을 것이다. 범행 후 칼을 배수로에 버리고 무인 세탁소에 들러 피 묻은 옷을 빨았다. 승용차를 버린 뒤 택시를 여러 번 갈아탔다. 죽고 싶었던 그는, 살고 싶어진 것일까. 죽은 이와 다친 이와 찌른 자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왜 그랬을까.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답 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배회한다.

이런 참사 앞에서 ‘만약에’는 부질없는 가정이다. 그런데도 떨쳐내기가 어렵다. 만약에 여학생이 다른 길로 갔더라면, 만약에 그 시간 경찰이 순찰했더라면, 만약에 여학생이 아슬아슬하게 칼을 피하고 사람들이 달려와 범인의 옆구리를 걷어찼더라면, 만약에 범인이 자신의 뺨을 한 대 때린 뒤 마음을 바꿔먹었더라면,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야마무라 구미코는 스물다섯 살 장애인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뇌성마비 환자가 되었고,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를 타야 했다. 할머니와 둘이 살던 구미코는 어느 밤 산책을 나간다. 할머니는 경사진 길에 구미코를 잠시 둔 채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간다. 구미코는 인기척을 느낀다. 다음 순간 휠체어가 빠르게 굴러간다. 거침없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할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뒤쫓지만 따라잡을 수 없다. 구미코는 너무 놀라 정신을 잃는다. 비탈길에서 올라오던 사람 그림자 하나가 비명을 듣고 쏜살처럼 달려와 미끄러져 내려오는 휠체어를 붙잡는다. 휠체어의 속도와 무게로 그가 넘어지고, 덕분에 휠체어는 멈춰 선다. 남자의 이름은 쓰네오였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구미코는 자신을 ‘조제’라고 불러달라 말한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속 주인공의 단골 이름이다. 둘의 관계는 부침을 겪는다. 어느 날엔 동물원으로 호랑이를 보러 가고, 어느 날엔 물고기를 보러 수족관을 찾는다. 다나베 세이코의 소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줄거리.

조제는 ‘그날’의 인기척에 대해 “악의에 찬 인간의 느낌”이었다고 회상한다. 만약 휠체어를 멈추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악의에 찬 그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소설 속 주인공은 다행히 살았는데, 우리 현실은 소설보다 잔인해 응급구조사를 꿈꿨던 사람을 잃고 말았다.

조제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던 프랑수아즈 사강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외친 적 있다. 동의한다. 하지만 전제를 잊지 말자. 그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타인의 삶을 파괴할 권리가 대체 누구에게 있는가. 명복을 빌어도, 죄인이 된 것만 같다.

 

사진·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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