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종일 작은 버스를 타고 가던 길이었지. 화장실이 급해 들른 한적한 들판의 주유소 철조망 밖으로 네가 보이더구나. 도시에서 온 친구들은 깜짝 놀라고, 거기 살던 이들은 심드렁했지. 너는 사람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더구나. 개처럼 초롱초롱한 눈빛, 보드랍고 복슬복슬한 털, 탐스러운 꼬리. 여우가 사람을 홀린다는 말은 너의 사랑스러운 모습에서 비롯된 게 아닌지. 2025년 칠레 파타고니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아낀다.
아끼는 사람이 있고, 아끼는 물건이 있으며, 아끼는 동물도 있다. ‘그들’은 제각각이다. 때로 조화를 이루고, 때론 불화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로 반목할 수 있으며, 내가 좋아하는 이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끔찍하게 싫어할 수도 있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아끼고 좋아하는 일에는 복잡한 대가가 따른다. 기꺼이 감수하지만, 때론 상처받는다. 그러다가 멀어진다. 그러다가도 가까워진다. 좋아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지만, 말문을 닫고 마는 경우도 있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알베르토와 디에고는 한 살 터울 형제였다. 후기 인상파 화가인 아버지 조반니 자코메티의 핏줄을 이어받아 시각예술에 두각을 드러냈다. 재능이 남달랐던 알베르토는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자랐다.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어쩌다 한 노인과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호텔에서 그의 죽음을 목도한다. 낮에는 살아 있던 사람이었다. 이튿날엔 주검이었다. 그로부터 ‘산 존재의 취약함’은 알베르토에게 평생의 화두가 되었다. 이듬해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알베르토는 아카데미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조각을 공부한다. 몇 년 뒤 동생 디에고가 합류한다.
알베르토는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교류했고, 명성을 얻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디에고는 형의 첫 모델이자, 평생의 모델이었다. 둘은 더없는 단짝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알베르토는 고국으로 피란하지만, 디에고는 작업실을 지키기로 한다. 외롭게 홀로 지내던 디에고에게 이웃이 특별한 선물을 준다. 여우였다. 디에고는 여우에게 ‘마드무아젤 로즈’라는 이름을 붙이고 각별한 정을 나눈다.
전쟁이 끝나고 형이 돌아왔다. 동생은 형에게 집 밖으로 통하는 앞마당 문을 절대 열어두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형은 가볍게 흘려듣는다. 어느 날 마드무아젤 로즈가 사라진다. 여우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실망한 디에고는 한동안 형과 말을 섞지 않는다. 형은 꾸준히 작업했고, 동생은 형을 도왔다. 그렇다고 마드무아젤 로즈가 마음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20세기 조각과 초현실주의, 실존주의 예술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가 빚은 사람들은 단단한 청동으로 만들어졌지만 보기에는 부스러질 듯 가늘고 거칠다. 비평가들은 이를 “인간 실존의 참혹한 고독과 그 뼈대만 남은 본질”이라고 평했다. 그 참혹한 뼈대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된다. 형의 전속모델이자 조력자이던 디에고 또한 조각가가 되었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동물 조각이 많다. 형의 영향을 받은 까닭에 그의 동물들도 가늘고 길다. 디에고는 형의 쉰 번째 생일에 선물할 청동촛대를 만들었다. 위쪽에 말 두 마리의 머리가 선명한데, 거칠게 다듬은 아래쪽엔 뭔가 보일 듯 말 듯 하다. ‘자코메티와 여우’를 쓴 토마스 감마는 거기서 작은 여우를 보았던 걸까.
아끼는 사람의 실수는 우리를 힘겹게 한다. 실수를 탓하다가 외려 실수를 범하고, 말도 없이 화해가 오고.
사진·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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