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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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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목장에서 죽음 기다리던 스물두 살 백설이, 다시 행복해

이수현 ‘일산 승마센터’ 대표가 구조한 제주마 “네 살 전후 은퇴·도축되는 경주마들, 말다운 삶 살 수 있어야”
등록 2025-05-01 22:23 수정 2025-05-07 09:50
김주한(오른쪽부터), 태희 쌍둥이 남매가 경기 고양시 들녘에서 백설이에게 억새를 먹이고 있다.

김주한(오른쪽부터), 태희 쌍둥이 남매가 경기 고양시 들녘에서 백설이에게 억새를 먹이고 있다.


스물두 살의 제주마 백설이가 봄기운이 완연한 경기 고양시 들녘을 산책하며 풀을 뜯는다. 열한 살 김주한·태희 쌍둥이 남매가 함께 거닐며 억새를 뜯어다 백설이 앞에 내밀자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한 뼘도 안 남은 억새 토막을 든 아이들이 깜짝 놀라 마주 본다.

충남 공주시 폐목장에서 발견된 20여 필의 퇴역 경주마 틈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백설이는 2024년 12월28일 이곳으로 왔다. 이곳은 사람과 말을 함께 치유하는 고양시 일산서구 구산동 ‘일산승마 마(馬)음치유&트레이닝센터’다. 센터를 운영하는 이수현 대표가 말에 대한 글을 쓰는 블로그 ‘마냥마냥’을 운영하는데, 이 블로그를 통해 폐목장 상황에 대한 제보를 받았다. 버려진 말들이 도축용으로 팔려가거나 죽음을 기다리며 뼈가 앙상한 채 사체들과 섞여 지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제보자가 마지막 남은 말들이라며 보내준 사진 속 백설이가 자꾸 눈에 밟혔다. 구조를 결심하고 폐목장에 백설이 값을 치른 뒤 이곳으로 데려왔다. 말차를 빌리는 데도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또 말 한 필을 키우는 데는 건초와 사룟값 등 한 달에 70만~80만원이 꼬박 든다.

경주마들은 경기력에 따라 다르지만 이르면 두 살에 퇴역하기도 한다. 평균적으로는 네 살 전후에 은퇴해 승용마로 팔려가거나 마차를 끈다. 이런 선택을 받지 못하면 고기·마유·약재용으로 도축된다. 아프거나 병들어 이마저 어려우면 공주 폐목장 같은 곳에서 굶어 죽게 한다.

이수현 대표는 이런 냉혹한 현실에 새 길을 내고 있다. 달리기를 못할 정도로 심한 천식을 앓았던 이 대표는 2003년 미국 여행 중 ‘치유 승마’를 접했다. 꾸준히 승마를 한 뒤 말 등에서, 또 땅에서 달릴 수 있게 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2024년부터 퇴역 경주마 또는 승용마에서도 은퇴한 말들이 스스로와 사람을 치유하며 남은 삶을 보낼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백설이의 긴 속눈썹 아래 짙은 눈동자에 사진을 찍는 필자가 비치고 있다.

백설이의 긴 속눈썹 아래 짙은 눈동자에 사진을 찍는 필자가 비치고 있다.


백설이는 이곳에 와서 빠른 속도로 건강을 되찾았다. 도드라졌던 갈비뼈에 살이 붙자 2025년 2월 중순부터 사람이 몸을 만지고 갈기를 빗어주는 그루밍 수업에 참여했다. 여기서 더 발전해 마장에 풀어놓고 이름을 불러 다가오면 안아주는 커들링(Cuddling) 수업에도 참가했다. 그리고 이제 아이들이 백설이 등에 타는 기승과 바깥 산책을 하는 융합 수업을 한다.

이 대표는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과 말의 동물권은 사뭇 다른 것이라 강조한다. 말은 등에 파리가 앉은 것을 느낄 정도로 예민하다. 그래서 100가지 넘는 기수의 움직임을 기수와 교감하며 수행하는 마장마술이 가능하다. 또 말은 좁은 공간에서 쉬기보단 들판을 달려야 한다. 이런 것들을 하게 해주는 것이 말다운 삶이다.

아이들은 이곳에 있는 커다란 몸집의 퇴역 경주마 여섯 필과 달리 눈높이가 엇비슷한 백설이에게 쉽게 다가간다. 백설이도 아이들한테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한데 어울린다. 백설이와 산책을 나선 태희가 “백설이는 하얘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한다. 주한이는 “백설이는 작아서 큰 말을 탔을 때 느껴지는 딱딱함이 아니라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고 거든다.

이곳은 아직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대표가 직장에 다니며 번 수입으로 적자를 메운다. 그럼에도 이 대표는 말한다. “치유 승마센터가 하나둘씩 생겨나 아이템을 뺏긴다며 주변에서 걱정하는데,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사람과 말, 그리고 나 자신한테 좋은 일이니까요.”

이수현 일산승마 마음치유&트레이닝센터 대표가 마장에서 백설이와 눈을 맞추고 있다.

이수현 일산승마 마음치유&트레이닝센터 대표가 마장에서 백설이와 눈을 맞추고 있다.


 

사진·글 이정우 사진가

 

*낯섦과 익숙함, 경험과 미지, 예측과 기억, 이 사이를 넘나들며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시각적 자극이 카메라를 들어 올립니다. 뉴스를 다루는 사진기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한 이정우 사진가가 펼쳐놓는 프레임 안과 밖 이야기.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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