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을 파고드는 셔틀콕을 서로 받아치려다 한발 앞서 받아낸 남편이 코트 바닥에 뒹군다. 이 셔틀콕이 가까스로 네트를 타고 넘어가 점수를 얻자 아내가 뛰어오르며 탄성을 지른다. 보는 이마저 짜릿한 행복감을 느낀 이 순간이 ‘온전한 사랑’은 아닐까.
문화가 다른 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모여 배드민턴으로 실력을 겨루는 ‘2024 전국 다문화가족 배드민턴대회’가 2024년 8월24일 경기 고양시 대화동 고양체육관에서 열렸다. 올해로 15회째를 맞은 이 대회는 성인부 부부복식, 중고등부 혼합복식, 초등부 혼합복식으로 나눠 치러졌다. 참가 신청자가 450명에 달해, 예선 리그 없이 전 경기가 한 번 패하면 탈락하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됐다.
배드민턴 동호인들은 “이혼하려면 부부 한 팀으로 대회를 나가라”고 말하곤 한다. 남과 한 팀을 이뤄 경기할 땐 칭찬과 격려가 넘치지만, 배우자와 한편으로 시합하면 서로 탓하고 질책하느라 감정이 크게 상한다는 것이다.
이날 대회엔 그 ‘위험하다’는 부부복식 경기에 58쌍이 참가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태어난 나라가 다른 다문화 부부였다.
이들 중 이예닮·이타티야나 팀이 선뜻 눈에 들어왔다. 키가 유난히 크기도 했지만, 점수를 딸 때마다 큰 동작으로 환호하는 타티야나의 밝은 에너지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2014년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의 한 교회 청년부에서 만나 2년간 사귄 뒤 결혼했다. 1991년생인 예닮씨는 2000년에 러시아로 이주해 학교를 마친 뒤 정형외과 전문의로 일했다.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함께 쓰는 러시아 관습에 따라 이타티야나가 된 아내는 세 살이 어리다. 2023년 12월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예닮씨는 우리나라 의사 자격증을 따려고 예비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말에 서툰 타티야나를 대신해 “아내가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내년에도 꼭 다시 참가하자네요”라고 예닮씨가 소감을 전했다. 배드민턴 코트에서 경기를 처음 해봤는데 무척 즐거웠다는 그는 두 경기밖에 못한 걸 못내 아쉬워했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것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들과 반대로 초등부 복식에 출전한 신동주(충남 논산동성초 5년)군은 출전 선수 중 작은 편이다. 하지만 점프 스매싱은 동호인 수준을 넘어선 솜씨다. 논산의 가족센터 ‘키움클럽’에서 만난 김민주군과 짝을 이뤄 초등부에서 우승했다.
필리핀 라구나 출신인 어머니 윤단아씨가 배드민턴을 즐겨 여섯 살 때 경기장에 따라갔다가 배드민턴을 시작했다는 동주군은 벌써 6년 경력이다. 학교생활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 강당에서 친구들이랑 배드민턴 치는 거라고 말할 정도로 푹 빠져 있다.
이날 받은 우승 상금(50만원)으론 “배 고플 때 간식을 사먹겠다”고 답했다. 동주군의 부모님인 신영철·윤단아 팀은 세 경기를 이겼지만 8강에서 탈락했다. 그래도 어머니 윤씨는 “경기하는 게 재밌었다. 아들이 우승해서 더욱 기쁘다”고 말했다.
진정한 고수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부부가 한 팀으로 경기하면 감정이 상하지만, 상대 팀으로 만나 강 스매싱을 두드려 맞으면 더 밉상이다.” 그래도 한편일 때가 좋단 뜻이다.
여러 나라 출신에 다양한 문화를 배경으로 맺어진 부부와 자녀들은 이날 셔틀콕에 사랑과 우정을 담아 주고받았다. 이들의 스매싱에 날려 차이와 차별은 네트 저편으로 멀어져갔다.
사진·글 이정우 사진가
*낯섦과 익숙함, 경험과 미지, 예측과 기억, 이 사이를 넘나들며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시각적 자극이 카메라를 들어 올립니다. 뉴스를 다루는 사진기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한 이정우 사진가가 펼쳐놓는 프레임 안과 밖 이야기.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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