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대안운동을 찾아서]
핵을 극복하고 진정한 주민자치 공동체를 위해 다양한 실천 모색하는 부안 주민들
부안= 글 · 사진 김타균/ 녹색연합 국장 greenpower@greenkorea.org
지난 5월4일 전북 부안을 찾는 마음은 몹시 설다. 핵 없는 세상을 위해, 죽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랬다. 핵폐기장 유치를 둘러싸고 지난 8개월간 생업을 팽개치며 투쟁을 벌여왔고, 지난 2월14일 주민투표의 승리로 이제 “일상 속에서 투쟁하자”며 생업에 복귀한 부안 주민들은 지금 무엇을 고민하고 있을까.
인정받지 못한 주민투표
서울에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부안 버스터미널, 시장 어귀에 내걸린 낡은 반핵 깃발이 반갑게 다가왔다. 오고 가는 차량이나 제과점, 약국 등지에도 노란 반핵 깃발이 부착돼 있어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땅의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쓴 부안 주민투표 개표 결과는 유권자의 73.73%(위도면 제외)가 참여하여 91.89%가 핵폐기장 유치를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여전히 부안군수의 유치신청은 유효하고, 정부도 부안 주민의 투표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부안 주민들은 정부와 지자체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격포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장진한(38)씨는 “정신적·육체적으로 힘들었습니다. 일이 손에 안 잡힙니다. 우리는 2월14일 주민투표에서 승리했는데 정부가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아 답답합니다”라고 말했다.
반핵운동의 근거지인 부안 성당. ‘핵 없는 평화’가 새겨진 장승이 묵묵히 성당 입구를 지키고 있다. 느티나무에는 노란 연등이 내걸려 이곳이 부안지역 반핵운동의 근거지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이곳 주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핵폐기장 유치신청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이현민(38·부안대책위 집행위원장)씨는 말한다. 그는 “농민운동을 하면서 한때 농민운동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지만, 이번 핵반대 투쟁을 통해 식량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식량다국적기업에 대한 조직적인 대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부안대책위 총무를 맡고 있는 조미옥(34)씨 역시 생활이 망가졌다고 한다. 심지어 반찬 만드는 방법도 잊어버렸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핵폐기장 싸움을 통해 에너지 문제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에너지 절약을 집에서 실천해 전기료를 월 만원 정도 줄였다. “에너지 절약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핵폐기장 문제는 또다시 우리 곁으로 찾아올 거예요.”
지금 부안은 핵을 극복하고 진정한 주민자치 공동체를 이룩하기 위해 다양한 실천이 지역주민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핵폐기장 문제는 부안 주민들에게 큰 시련을 안겨줬으나 그 과정을 통해 주민들 스스로 지역의 문제를 결정하고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부안 투쟁이 단순히 핵폐기장 싸움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환경도 살리고 지역주민의 삶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주용기(37·새만금사업을 반대하는 전북사람들 상임집행위원장)씨의 말이다. 핵폐기장 반대투쟁으로 모아진 역량을 부안 주민이 참여하는 지역사회 건설로 모아가자는 바람이다. 부안지역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다양한 영역에서 이뤄지고 있다.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한 활동도 탄력을 받고 있다. 최근에 ‘새만금사업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은 새만금 갯벌을 지키려는 모든 사람들의 뜻을 모아 ‘부안새만금생명평화모임’으로 거듭났다. 새만금 갯벌을 되살려 후세에 건강하게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부안 주민투표를 지원했던 시민단체들은 지난 4월20일 부안 주민자치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부안발전시민사회네트워크’를 발족했다.
부안주민자치학교, 아는만큼 보인다
5월4일은 부안주민자치학교가 문을 여는 날이었다. 늦은 저녁, 부안성당에는 나이 많으신 어르신네와 주부, 청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접수대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들이 참가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 행사를 준비한 지아가(27)씨는 “부안을 아름다운 지역사회로 만들자는 주민들의 요구가 많았다”며, ”부안군민 스스로 자치의 힘을 강화해서 지역사회 발전과 공동체성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주민자치학교를 마련하게 됐다”고 밝혔다. 부안군 동진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김평권(62)씨는 “막말로 뭘 알아야 면장을 할 것이 아닌가”라며 농담 같은 말을 건네더니, “아는 만큼 보인다고 주민자치를 실천하기 위해 배우러 왔다”고 학구열을 불태웠다. 그의 깊게 파인 주름에서 삶의 지혜가 묻어나오는 듯했다. 읍내에서 장사를 한다는 심상규(51)씨는 “부안을 살맛 나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공부를 해보자”는 이유로 자치학교에 참여했다고 말한다. ‘왜 지방자치인가’라는 주제로 강형기(충남대 사회과학대) 교수가 강연자로 참여했다. 강 교수는 “지방자치는 주민의 꿈을 실현하는 사업체와 같습니다. 주민들의 꿈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주민의 생각을 가슴으로 듣고 주민의 아픔을 마음으로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방자치는 가슴으로 하는 정치입니다”라고 말했다. 삶과 삶터에서 고단한 하루를 보낸 40여명의 참가자들은 이날 밤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자치의 기본원리를 자각하는 듯했다. 부안의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가려는 부안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부안의 발전과 진정한 주민자치 실현의 꿈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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