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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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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린 펼침막도 다시 보자

등록 2004-09-10 00:00 수정 2020-05-03 04:23

[풀뿌리 대안운동을 찾아서]

과천 ‘푸른여성모임’의 아름다운 재활용… 생활쓰레기도 줄이고 저소득층 일자리도 만들고

▣ 과천= 글 · 사진 김타균/ 녹색연합 국장 greenpower@greenkorea.org

거리 곳곳이 펼침막들의 홍수다. 전봇대·가로등·가로수 등 걸릴 만한 곳이면 예외가 없다. 대리운전, 주택분양, 학원 홍보, 세일 광고 등등…. 광고효과는 어떨지 몰라도 그 처리를 둘러싸고 지방자치단체는 골머리를 앓는다. 그런데 넘쳐나는 펼침막을 재활용해 자원도 아끼고 일거리도 만드는 곳이 있다.

“드~르럭, 드~르럭.” 8월10일 오후 경기도 과천시민회관 2층 로비는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로 요란했다. 정춘교(76·과천시 문원동) 할머니는 요즘 무척 바빠졌다. “일도 하고 사람들도 사귀고, 내 힘으로 용돈을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올해 초부터 정 할머니가 나가고 있는 ‘직장’은 이곳 작업장이다.

안정성과 청결에 이상 없다

이제 막 재봉일을 배운 젊은 여성과 함께 정 할머니는 박음질에 여념이 없다. 정 할머니는 재봉틀 앞에 자리를 잡고 익숙한 솜씨로 신발주머니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재봉일을 했다는 할머니는 올해로 재봉질 경력만 60년 정도. 경력이 말해주듯 ‘도사’의 경지여서 눈깜짝할 사이에 신발주머니 완제품 하나가 만들어졌다. 이들이 펼쳐놓은 천은 여느 천과 달랐다. 재단돼 있는 천에는 여러 색상과 크기로 글씨가 쓰여 있었다. 분명히 펼침막이었다. 펼침막을 재활용해 신발주머니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세탁한 펼침막을 재단하고, 일정한 크기로 재단된 펼침막을 반으로 접은 뒤 재봉틀로 박음질하고 필요한 액세서리를 붙이면 끝이다.

펼침막 재활용 아이디어는 ‘푸른 내일을 여는 여성들의 모임’(이하 ‘푸른여성모임’)에서 나왔다. 매년 가을에 열리는 과천마당극제 참가작을 알리는 질 좋은 펼침막이 쏟아져나오는 것을 보고 재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시작했고, 장바구니와 쓰레기수거용 포대, 제설용 모래주머니 등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펼침막은 홍보용으로 만들어져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보름 정도 걸린 뒤 소각·폐기되는 일회용으로 인식돼왔다. 펼침막은 부피가 커 수거가 어렵고, 처리 방법도 마땅치 않다. 당연히 처리 비용도 만만찮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지방자치단체들이 거둬들이는 불법 펼침막과 폐펼침막이 하루 평균 1t 트럭 1대 분량이라는 통계도 있다.

푸른여성모임 재활용분과에 참여하는 20여명의 회원들은 과천시청이나 펼침막 제조업체 등에서 펼침막을 수거해와 각자 집에서 손수 세탁된 펼침막을 재단해 재봉일에 익숙한 할머니들과 저소득층 주부에게 공급해 그들의 손을 거쳐서 제품을 완성한다. 처음에는 할머니들이 과연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려는 금방 해소됐다. 훨씬 질 좋은 제품이 나왔기 때문이다. 할머니들 역시 하나 만드는 데 1천원을 벌 수 있어 소일도 하고 용돈도 벌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 만든 장바구니는 매월 한번씩 열리는 알뜰장터에서 팔리기 시작했고, 환경단체들에도 보냈다. 회원들은 백화점이나 할인매장에서 그들이 만든 장바구니를 볼 때 가장 뿌듯하다고 한다.

펼침막 재활용에 난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안정성과 청결에 대한 우려가 높았던 것이다. 펼침막을 세탁할 때 찌든 먼지로 생길 수 있는 실내 오염과 세탁기 오염의 우려가 그것이었다. 결국 한국생활환경시험연구원에 몇 가지 검사를 의뢰한 결과 신축성과 찢어짐의 정도, 박음질한 봉합 강도가 기존 장바구니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었다. 세탁 전후의 중금속 오염도 검사에서도 합격점을 받았다.

장바구니 제작이 본격화하자 포항·대구·안산 등의 자활후견기관에서 찾아왔고, 푸른여성모임은 이들에게 장바구니 샘플과 관련 자료를 보내주기도 했다. 김득주 푸른여성모임 자원재활용분과장은 “펼침막 재활용은 독거노인 등 저소득 계층의 일자리를 만든다는 의미도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자원도 재활용하고 일거리도 생기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사업이 전국의 자활후견기관이 중심이 되어 널리 확산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질 좋은 펼침막 보면 찜해 둔다”

푸른여성모임은 과천녹색가게의 한쪽 벽을 막아 사무실로 쓰고 있다. 푸른여성모임은 녹색가게의 모델이 된 ‘과천녹색가게’로 더 유명하다. 1996년 과천시민회관 상설매장에서 알뜰장터를 운영하던 지역 주부들이 구상한 뒤 YMCA에 의견을 개진하면서 녹색가게가 탄생한 것이다. 쓰지 않는 헌 옷이나 물건을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물물교환을 기본으로 하고, 물건을 팔 사람과 살 사람을 직접 연결해주는 위탁판매도 한다. 국제통화기금(IMF) 때는 하루 1천여명이 몰려들 정도로 인기가 높았고, 지금도 하루 평균 120여명이 드나드는 명실상부한 ‘장터’다. 사무실 게시판에는 ‘바느질 아르바이트 하실 분’을 찾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이곳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다 최근 상근활동가로 일하는 정선희(42) 간사는 각양각색의 펼침막 재활용 물품들을 보여줬다. 정 간사는 “거리마다 걸려 있는 펼침막을 볼 때마다 ‘어떤 모양의 장바구니를 만들까’ ‘펼침막을 참 이쁘게 만들었네’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직업병’이 생긴 것 같다”면서 “질 좋고 개성 있는 펼침막을 보면 ‘찜’해뒀다가 게시 유효기간이 지나면 직접 걷어올 정도”라며 웃었다.

푸른여성모임은 지난 몇년 동안 생활쓰레기를 줄이는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왔다. 15년 이상 오래 쓴 물건을 공모해 ‘추억이 담긴 물품전’을 열기도 하고, 다양한 재활용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재활용 강좌’도 연다. 매주 수요일 오전에 열리는 강좌에는 자투리 천을 이용해 모자를 만들거나 옷을 고쳐 입는 방법도 교육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물건이 쏟아져나오는 첨단 소비사회에서 버려지는 생활쓰레기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사람들이 있어 재활용의 의미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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