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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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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닭들이 있는 마을

등록 2004-12-24 00:00 수정 2020-05-03 04:23

[풀뿌리 대안운동을 찾아서]

안솔기 마을의 간디 유정란 농장…닭을 ‘인격체’로 대하며 첨가제 없는 사료만 먹인다

▣ 김타균/ 녹색연합 국장 greenpower@greenkorea.org

‘똑똑….’

지난 12월17일 이른 아침 지리산 끝자락에 위치한 둔철산에 자리잡은 간디 유정란 농장(경남 산청군 신안면 안솔기마을). 주인 최세현(43)씨는 닭장에 들어가면서 문을 두드렸다. 산란실 문을 열자 막 알을 낳은 암탉들이 “꼬꼬댁∼” 하며 날개를 푸드덕거린다. 깜짝 놀란 필자를 보더니 최씨가 빙긋이 웃었다. “닭도 그냥 문을 열면 놀라지 않겠어요. 그래서 꼭 노크를 하지요. 닭을 인격체로 대해야 양질의 유정란을 돌려받을 수 있지요.”

밀려도 닭 늘리지 않는다

방문객을 향해 벼슬을 세워 경계를 놓지 않는 놈, 물을 맛나게 먹는 놈, 정신없이 이것저것 집어먹는 놈, 나뭇가지에 앉아 맵시를 뽐내는 놈, 점찍은 암탉 주변을 졸졸 따라다니는 놈…. 튼튼하게 생긴 닭들로 닭장 안은 활기가 넘쳤다.

특별한 배려는 양계장의 구조에서도 드러났다. 보통의 닭장들은 24시간 전등을 켜놓지만, 이곳은 따뜻한 햇볕이 들어올 수 있도록 돼 있고 특별한 조명기구는 없다. 수탉 한 마리에 암탉 15~20마리씩 활동하기에 충분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닭을 ‘달걀 낳는 기계’로 취급하는 비좁은 닭장이 아니었다. 양계장 구조보다 더 신기한 것은 한 마리 한 마리 닭들마다 모두 ‘2003. 2. 16 生’ ‘2004. 1. 5 生’ 생년월일이 적혀 있는 점이었다. 사람에게도 생일이 있듯이 이들의 생일을 기억해주겠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했다.

닭장 안으로 들어서니 마치 담요를 밟은 것처럼 푹신했다. 손으로 바닥을 파자 왕겨와 부엽토가 속살을 드러낸다. 바닥은 부엽토에 왕겨를 섞어 약 30cm 두께로 깔려 있었다. 냄새가 안 나는 이유는 바로 부엽토 속에서 자라는 미생물이 닭똥과 오염원을 분해하기 때문이란다. 최씨는 닭똥을 섞은 부엽토를 주변 생태 농가에 거름으로 나눠준다. 주변 농가 사람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살다가 귀농했는데, 그들은 풀이 안 나는 겨울철에 신선한 야채로 되돌려주곤 한다. 최씨는 이런 ‘나눔’에 대해 “자연스러운 순환이 이뤄지는 것”이라며 “똥도 버릴 것 없이 고스란히 자연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배운다”라고 말했다.

최씨가 신경을 가장 많이 쓰는 것이 ‘사료’다. 항생제나 산란촉진제 등 첨가제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 순수 곡물 사료를 인근에서 닭을 키우고 있는 농가들과 공동 구매한다. 이날 별도의 사료를 공급받기 위해 경남 함양 청미래마을과 경남 하동 옥종면 등 인근 지역에서 생태적으로 닭을 키우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였다. 최씨는 몇년 동안 이들에게 ‘생태적으로 닭 키우기’ 노하우를 전수했다. 대구에서 학원을 운영하다 함양 청미래마을로 귀농한 김연창(41)씨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가정을 찾는 일이 가장 어렵다”며 “공동으로 직거래를 넓히는 방법을 모색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씨는 “한약재를 너무 많이 주면 비만이 생겨 건강한 알을 낳지 못한다”며 그동안의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날 모인 이들은 직거래를 넓히는 방법과 닭을 키우면서 겪는 어려움 등을 공유하면서 네트워크를 마련하기 위한 얘기를 이어갔다.

지리산 자락에 따스한 햇살이 들어올 무렵 농장 주인 최씨가 산란장에서 유정란을 꺼냈다. 수확하는 유정란은 하루 400여개라고 했다. 최씨는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유정란을 수확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생태 농사꾼’인 최씨는 고집스럽게 반나절만 일한다. 600여 마리만 기르면 네 식구 먹고살기에 충분하단다. 최씨 혼자 작업해도 4시간 정도만 일하면 하루 노동이 끝난다는 계산법이다. “주문이 많을 텐데 돈 욕심이 생기지 않느냐”고 넌지시 묻자, 최씨는 “주인이 적당한 규모로 닭을 키워야 스트레스가 없지 않으냐”며 “욕심을 부려 더 많은 수의 닭을 키우게 되면 자연스럽게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이고, 이는 고스란히 닭들에게 전달돼 건강한 유정란을 수확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입소문을 타고 주문이 밀리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매주 이틀 진주 시내 300여 회원들에게 유정란을 직접 배달한다. 그가 대형마트나 백화점 등 ‘시장’을 마다하고 ‘직거래’를 고집하는 것은, 직거래를 통해야만 농사짓는 이와 소비하는 이가 얼굴을 맞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 ‘건강성’이 살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먹는 것을 누가 생산했는지, 그들의 살림살이가 어떤지를 아는 소비자가 시장이 결정하는 가격이 아닌 생산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을 직거래를 통해 지급한다는 것이다. 그는 직거래에 대해 “‘사람 농사’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서로를 책임지는 ‘가족’의 관계를 일구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량 생산을 하는 양계장은 질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며 “소농 위주의 직거래가 우리 농업의 살길”이라고 덧붙였다.

가로등 없는 작은 마을, 안솔기

최씨가 이런 철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안솔기마을이 대안학교인 ‘간디학교’의 배후 마을로 학부모와 교사, 대안교육 이념에 동참하는 주민들이 생태적 주거지 건설을 목표로 만들어진 곳이라는 점도 큰 힘이 됐다. 생태마을인 이곳은 가로등이 없어 집집마다 손전등이 필수품이다. 합성세제나 샴푸도 쓸 수 없다. 수세식 화장실 대신 마당 모퉁이마다 자연발효식 화장실이 있다. 이곳 집들은 단순하고 작고 낮아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지어졌다. 꾸미려 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자연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주민들의 생각이 오롯이 녹아 있는 셈이다.

흔히 삭막한 아파트는 ‘닭장’이라고 부른다. 이곳 안솔기 마을의 닭들은 그런 ‘닭장’에서 살지 않아도 되는 행복한 닭들이다. 닭들이 행복해야 주인이 행복하고, 농부가 행복해야 도시인이 행복하고, 자연이 행복해야 인간도 행복해지는 것이다. 안솔기마을은 당연한 이치를 현실로 보여주는 곳이다.

‘풀뿌리 대안운동을 찾아서’는 이번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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