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전력은 시민의 것

등록 2004-10-14 00:00 수정 2020-05-03 04:23

[풀뿌리 대안운동을 찾아서]

<font color="darkblue">시민들이 배심원이 돼 원자력 발전 등 전력정책 전문가들과 결론을 찾아가는‘합의회의’</font>

▣ 글·사진 김타균/ 녹색연합 국장 greenpower@greenkorea.org

보통사람들의 학술회의가 열렸다.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가 지난 10월8~11일 서울 국민대에서 연 ‘원자력 중심의 전력정책 어떻게 할 것인가-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 합의회의’에서다. 패널로 참여한 시민들은 보통사람다운 생생한 질문들을 던졌다.

“전력정책 변화가 다른 산업에 끼치는 파급 효과는 어느 정도인가?” “핵폐기물의 위험성에 대해 구체적인 근거를 말해달라!” “세계적으로 재생에너지의 비율이 확대되고 있는데 그동안 한국은 이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하지 않았나?” “핵발전소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은 없는가?” 온갖 질문들이 에너지 정책 담당자와 관련 전문가에게 쏟아졌다. 일부 시민패널들은 ‘지역이기주의’와 ‘님비’(NIMBY) 등 선입견을 줄 수 있는 용어를 바꾸자고 제안했다. 관련 전문가들이 “앞으로 40~50년간의 원자력에 대한 대안은 없다”며 시민패널들에게 하소연하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전국 자원자 중에서 선발

역할이 뒤바뀐 점도 신선했다. 시민패널들은 △에너지 및 전력 문제를 고려할 때의 가치기준 △전력정책의 현황과 바람직한 방향 △원자력 발전과 관련한 국내외 정책 동향 및 산업적 이해관계 △원자력 발전 지속 여부(유지·확대·점진적 폐쇄) △원자력 발전의 대안 △미래 전력정책 수립과 시설건설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를 위한 의사결정 구조 등에 관한 예비 질문서를 바탕으로 전문가들과 질의 응답을 이어갔다. 전력정책 결정과정을 독점하다시피 한 전문가와 기술관료들은 시민패널의 합리적 판단을 돕기 위해 정보 제공자로서만 구실이 제한됐다.

‘소비자 주권시대’라는 말이 일상용어가 됐지만, 전기 소비자들에겐 최근까지도 먼나라 얘기였다. 전력정책 결정과정에 시민들은 배제돼왔기 때문이다. 시민이 ‘주인공’이 되어 전문 집단이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토론에 토론을 거쳐 스스로의 ‘잣대’를 마련해가는 과정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줬다. 때때로 시민패널과 전문가 사이에 또는 전문가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져 긴장감이 돌기도 했다. 특히 반핵운동 진영과 핵산업계 관련자들이 합의회의라는 ‘중간지대’에서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갖가지 토론회와 세미나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듣기보다는 반쪽 행사로 전락하는 것을 지켜봐왔던 필자로서는 오래간만에 보는 토론다운 토론이었다.

이번 합의회의는 마치 외국의 시민배심원 제도와 같은 것을 정책결정 과정에 도입해보자는 아이디어를 현실화한 결과다. 원자력이나 생명공학처럼 논쟁적 사안과 관련해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도록 하자는 뜻이기도 하다. 시민패널은 다양한 입장과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한테서 정보를 제공받은 뒤 토론을 거쳐 채택한 최종 정책권고안을 기자회견 형식을 빌려 발표하게 된다.

직장인·농부·전업주부·학생들로 구성된 17명의 시민패널들은 지난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전국에서 지원한 176명 중에서 서류와 면접 심사를 통해 최종 선발됐다. 이 과정에서 전력정책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이들은 제외됐다. 개인사업을 접고 3박4일 동안 회의에 참여한 강상진씨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면서 “단편적 지식만 가지고 있었는데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숙의하면서 에너지 정책의 중요성과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는 울진과 영광 핵발전소 주변 지역주민들도 참여했다. 핵발전소로 고통받는 당사자들의 얘기를 직접 청취해보자는 시민패널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핵발전소가 필요하더라도 지역주민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하는 건 ‘무리’이기 때문이다.

회의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에너지 정책에 관한 사회적 합의기구를 상설화할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핵발전의 산증인으로 알려진 강창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에너지 정책 결정과정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미국의 ‘원자력 법정’이나 프랑스의 ‘특별행정법정’ 같은 국민의견 수렴과정의 제도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윤순진 서울시립대 행정학과 교수 역시 “에너지 공급의 형평성, 에너지 이용에 따른 편익과 비용 배분의 형평성을 위해 정책결정 과정에 시민참여를 보장하는 민주적 의사결정 체제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시민 합의안 받아들여라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마련한 합의안이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재 전력정책을 둘러싸고 정부 각 부처, 핵산업계, 환경단체와 지역주민 등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의회의가 열리기 하루 전, ‘부안 핵폐기장 백지화 삼보일배단’이 정부종합청사 후문 앞 기자회견장에서 경찰한테서 집단 폭행을 당하기도 했고, 국회 산자위 국감에서도 핵폐기장 문제와 사후처리 충당금 문제에 대한 의원들의 질책이 쏟아졌다.

문제는 시민들이 만든 ‘전력정책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권고안이 사장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권고안은 국회, 정부(청와대와 과학기술부, 산업자원부, 환경부 등), 언론사 및 시민사회단체에 전달돼 정책에 반영되도록 할 방침이다. 권고안은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는 촉매제 구실을 하는 한편 정부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구실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1998년과 99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주최로 유전자 조작식품의 안전성과 생명복제 기술의 윤리를 주제로 한 합의회의가 열린 바 있다. 그러나 사회적 관심에도 정책 결정자인 정부와 국회가 시민패널이 마련한 정책 권고안을 적극 수용하지 않았다.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김병수 간사는 “정부 관련 부처에는 여전히 자신들의 입장에서 유리하면 받아들이고, 불리하면 받아들이지 않는 풍토가 여전하다”며 “단순 설문조사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의 토론을 통해 만들어진 합의안이니만큼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여지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밀실에서 끼리끼리 결정하고, 선포하고, 밀어붙이면 된다”는 기술 관료와 소수 전문가들의 선입견은 시민에 의해 깨지고 있다. 전력정책에 대한 시민 권고안이 작게는 대화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정책 방향을 바로잡는 밑거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