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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디테일로 웃긴다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
등록 2010-01-19 15:00 수정 2020-05-03 04:25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

<동네에서 소문난 텐구의 아이>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자지러지는 게 소녀라고 했나? 요즘은 TV에서 몸빼를 입고 소똥 위를 구르는 게 소녀 아이돌이라고 하더군. 소녀들은 잘 웃는다. 그러나 소녀들도 제법 웃길 줄 안다. ‘분장실의 강 선생님’이나 처럼 하드코어로 망가져서 웃기는 게 아니다. 그들만의 소소한 언어로, 작은 몸짓으로 살짝살짝 웃긴다. 요즘 그런 웃음이 그립다.

여고생 주인공의 개그만화는 제법 장르군을 이루고 있다. 등이 대표적으로, 소녀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기대어 깨소금 같은 웃음을 쏟아낸다. 이렇게 대놓고 깔깔대게 만드는 만화도 좋다. 그러나 처럼 소녀만화의 달짝지근함을 이어가면서 살짝살짝 웃겨주는 맛을 아시는지? 소소하고 예민한 소녀의 감수성으로 우리를 자지러지게 하는 만화들 말이다.

이번주 나의 배꼽은 이와모토 나오의 만화 에게 맡겼다. 주인공 아키히메는 제목 그대로 텐구(天狗)라는 초자연적 존재의 자식이다. 수행에 의해 요괴의 경지에 오른 아버지 텐구는 산속에 머무르며 시골마을을 다스리고 있는데, 연상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그에게 반해 450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하게 된다. 이후 육아 분쟁 끝에 아키히메는 어머니와 함께 속세에서 살게 되지만, 텐구는 계속 딸에게 관심을- 너무 과도하게- 기울이고 있다.

아버지의 힘을 받아 2t 트럭 정도는 가볍게 들고, 아침 식사로 돈가스덮밥 30인분을 해치우는 소녀. 그러나 그 외에는 보통 여고생과 다를 게 없다. 짝사랑에 괴로워하고, 첫 고백에 두근대고, 엄마 몰래 치마를 짧게 줄이려고 애쓴다. 이렇게 다른 세계와 현실에 걸쳐 있는 상황에서 뜻밖의 개그가 작은 요괴들처럼 튀어나온다.

아키히메는 수련 텐구인 슈운에게 보호를 받고 있는데, 그가 기록한 ‘아키히메가 듣기 싫어하는 말 100선’ 정도는 가벼운 웃음거리. 아키히메는 짝사랑하던 타케루와 야심찬 첫 데이트를 위해 바다를 찾아가는데, 막상 내리니 가이드북에 적힌 상점가는 ‘완전 핑크 거리’라는 환락가. 게다가 ‘거의 단란주점, 거의 여성’ ‘종업원은 18살 이상의 닌자’, 이건 뭔가? 그 세세한 간판들을 꼼꼼히 읽어보는 나도 정상은 아니다 싶지만.

사소한 일에 망상을 부풀리고 작은 일에 청춘을 거는 게 또 여고생들의 특징. 꽃미남 타케루가 “나도 여친 엄청 갖고 싶지”라는 한마디를 내뱉자, 기대에 부푼 여고생들 위로 거룩한 신의 계시가 내린다. 반대로 축제에서 남녀가 짝을 짓는 ‘댄스’ 부문의 참가자가 단 5쌍이라는 말에 여고생들의 주변은 지옥의 영으로 가득 찬다. “모두의 뒤에 아수라가, 삼장법사의 전세와 전전세를 먹어치웠다는 삼사대장이 보여.” 이 모든 장면을 그저 착상이 아니라, 진짜 환영으로 눈앞에 보여주는 만화가의 펜이 진짜 웃음을 만들어낸다. 아이디어가 아니라 디테일에서 터지는 웃음. 이게 정말 좋다.

이명석 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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