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무샤라프 대통령의 든든한 지원국 미국, 민주화는 필요 따라 변하는 마술적 이중잣대
▣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성공회대 겸임교수kimsphoto@hanmail.net
11월 들어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된 파키스탄의 정치 위기는 새삼 미국의 패권주의적 대외정책이 지구촌 민초들에게 주는 고통을 확인시켜준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이 그의 독재를 비판해온 대법원장을 해임하고 대법원 건물을 무장병력으로 둘러싼 것은 미국 부시 대통령의 든든한 지원이 없다면 생각도 못할 일이다. 대통령에다 참모총장을 겸임하는 1인 독재자 무샤라프는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니까 내가 독재를 저질러도 눈감아줄 것이야”라는 판단을 내린 게 틀림없다. 비상사태 선포 뒤 미국의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면 그런 판단은 옳았다. 지난 9월 버마(미얀마) 군사독재의 유혈 강공책을 맹비난했던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9·11 뒤 하루아침에 위대한 정치인으로[%%IMAGE4%%]
1999년 10월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무샤라프는 9·11 동시테러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으로부터 ‘독재자’란 비판을 받곤 했다. 9·11이 그의 운세를 바꾸었다. 파키스탄은 오사마 빈 라덴의 근거지였던 아프가니스탄 옆이고, 인구 1억6천만 명이 넘는 이슬람 국가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반드시 끌어안아야 할 나라다. 그런 지정학적 이점이 미국이 무샤라프를 하루아침에 ‘독재자’에서 ‘위대한 정치인’으로 바꿔 부르도록 했다. 미국의 아프간 침공 무렵 파키스탄에 가보니 민심이 거칠었다. 그곳 사람들은 미국에 협조적인 무샤라프를 비난하면서 “무샤라프가 이슬람 형제 정신을 미국에 팔아넘겼다”고 한탄했다.
미국의 대외관계사를 돌아보면, 아무리 독재정권이라 해도 미국의 입맛(이해관계)에 맞아떨어진다면, 독재는 문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독재자라도 미국의 이익을 충실히 집행한다면, ‘위대한 정치인’으로 치켜세워왔다. 멀리 갈 것도 없다. 1980년 광주 민중항쟁을 총칼로 누르고 집권한 전두환 장군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도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은 전두환을 ‘위대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불렀다. 전두환이 민족주의적이고 개혁적인 인물이었다면, 그래서 미국의 이익을 위협할 만한 인물로 비쳤다면, 그런 환대는커녕 백악관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을 것이다.
“독재로 고통받는 국민들을 해방시키겠다.”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도록 하겠다.” 미국이 어떤 나라의 정치에 개입할 때마다 해오던 얘기다. 그런 논리 아래 미국은 군대를 보내거나 해당 국가의 군부를 움직여 입맛에 맞는 정권을 세워왔다. 가까이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2003)가 그랬고, 멀리는 석유 국유화를 추진했던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의 이란(1953), 남미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칠레(1973)가 그랬다. 그 무렵 중남미는 아예 미국의 뒤뜰이었다. 그레나다(1983), 파나마(1989), 아이티(1994)엔 미 해병대 병력이 나서서 정권을 바꾸었다.
여기서 나오는 물음 하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비롯해, 미국의 개입으로 권력을 빼앗기고 끝내는 생명까지 잃은 이들이 생전에 고분고분 미국의 국가이익을 챙겨주는 쪽으로 대미정책을 펼쳤다면 어땠을까. 이를테면 사담 후세인이 사우디아라비아, 이란에 이어 세계 제3위의 풍부한 매장량을 지닌 이라크 석유 이권을 미국에 뚝 떼주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쯤 가죽 소파에 등을 한껏 기댄 채로 월드컵 축구 녹화필름을 돌려보며 최고급 시가를 피우고 있지 않을까. 후세인의 불행의 씨앗은 그가 석유자원이 풍부한 나라의 반미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4만 명 학살을 눈감다
지미 카터 대통령(1977∼81)은 베트남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 등의 영향으로 ‘도덕성’이 정치적 담론으로 떠올랐던 1970년대 후반의 분위기를 타고 미 대통령에 뽑혔다. 민주화와 인권 외교를 대외정책의 간판상품으로 내걸었던 카터도 “미국의 전략적·경제적 이익과 맞아떨어질 때는 독재정권이라도 상관없다”는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한 보기는 니카라과의 소모사 독재정권. 미군에서 훈련과 군사장비를 지원받은 니카라과 정부군은 소모사의 독재에 항거하는 국민들을 4만 명이나 학살했지만 미국은 이에 눈감았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위 라틴아메리카 책임자 로버트 파스토의 발언. “미국은 니카라과에서 (미국의 투자자본과 국가이익이 위협을 받는) 통제 불능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미국은 니카라과가 독립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란다. 단지 미국의 국가이익을 해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말이다.”
여기서 미국식 민주주의론의 음험한 본모습이 드러난다. 첫째,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전략적·경제적 이익과 맞아떨어질 때에만 용납된다. 둘째, 독재정권이라도 미국의 이익과 맞아떨어질 때는 친선관계를 맺고 지지를 보낸다. 셋째, 그런 독재정권이 민중저항으로 약화돼 정치적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지고 미국의 이해마저 위협받는 단계에 이르면, 민주주의를 내세워 그 독재자를 좀더 온건한 친미 인사로 갈아치운다. 미국의 민주화론은 필요에 따라 기준이 변하는 마술적 이중 잣대다. 결국 독재냐 민주냐가 아니고, 친미냐 반미냐의 잣대가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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