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인질범과는 비협상’이 원칙이지만 인질 가족의 인지상정은 막지 못해
▣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정치학 박사 kimsphoto@hanmail.net
지난 1989년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됐으니, 우리나라가 여행자유화 시대를 맞은 지 벌써 20년이 가까워온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다녀왔지만, 무장괴한들에게 납치돼 인질로 고생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올 들어 나이지리아와 소말리아, 그리고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들은 한국인들도 인질범죄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정부의 공권력이 약한 제3세계에서는 외국인이나 부자들의 몸값을 챙기는 범죄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신종산업으로 자리잡은 상황이다. 이라크와 남미 콜롬비아가 대표적인 예다.
마약카르텔과 함께 게릴라의 주 자금원
이 두 나라뿐 아니다. 지금 지구촌 사람들은 ‘인질 납치의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대기업 간부나 기술자로 제3세계에 파견돼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의 경우 언제 자신이 인질범들의 먹이가 될지 모른다는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 되는 세상이다. 런던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보험회사 로이드(Lloyd)는 늘어만 가는 인질 사건에 맞춰 ‘몸값 보험’이라는 상품을 내놓았을 정도다. 로이드보험의 자매사인 히스콕스(Hiscox)그룹은 그동안 인질 납치와 몸값에 관련한 각종 자료를 모아왔다. 히스콕스에 따르면, 최근 10여 년 사이에 인질 사건이 해마다 늘어났고, 특히 콜롬비아와 멕시코 등 중남미 지역, 이라크·체첸과 우즈베키스탄 등 옛 소련 지역이 인질산업의 온상임을 알 수 있다.
콜롬비아는 납치가 빈번한 최악의 국가다. ‘남미의 실종센터’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납치·실종이 흔한 곳이다. 30년 넘게 내전에 휩싸인 나라로, 사회 변혁을 꿈꾸는 좌익 게릴라 콜롬비아혁명무장군(FARC)과 국민해방군(ELN)이 정부군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여왔다. 모두 합쳐 2만 명에 이르는 이들 좌익 게릴라는 콜롬비아 국토의 40%를 지배하고 있다. 콜롬비아는 현재 좌우 가릴 것 없이 몸값을 노린 무장조직들이 득실대서, 하루 평균 10명쯤이 납치된다.
콜롬비아 좌익 게릴라들의 주요 자금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지역의 마약카르텔로부터 이른바 ‘세금’을 걷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자들과 외국인 석유기술자 등을 납치해 거액의 몸값을 받아내는 것이다. 콜롬비아는 주요 석유 생산국의 하나로 많은 외국인 석유기술자들이 일하고 있다. 멕 라이언이 콜롬비아 좌익 게릴라에게 납치된 미국인 석유기술자의 아내로, 러셀 크로가 그 남편을 구출하는 프로급 인질 협상전문가로 열연하는 영화 (2000)를 보면, 콜롬비아 인질 납치극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라크는 인질 납치범들의 새로운 일터다. 지난 2003년 4월 바그다드가 함락된 뒤 반미 저항 게릴라들의 준동이 끊이지 않고 이라크 치안이 극도로 불안해지면서 전에 없던 새로운 현상이 생겨났다. 이라크 전역에 몸값을 노린 납치범죄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바그다드를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기업인과 의사를 비롯해 많은 현금을 지닌 중상층을 겨냥한 납치범죄가 빈발하고 있다. 그 때문에 부유층 자녀들은 학교를 오가는 것조차 안심하지 못한다는 소식이다. 이라크 현지 취재 때 바그다드의 부유층들이 몰려사는 만수르 지역에서 들은 얘기. 시내 중심가에서 큰 전자제품 가게를 하는 상인 마무드는 어느 날 한 통의 괴전화를 받았다. “당신 딸을 우리가 데리고 있으니, 10만달러를 내놓으라”는 협박이었다. 마무드는 경찰에 연락해봤자 딸의 목숨만 위태로워질 것으로 여기고, 힘든 협상 끝에 5만달러를 건네고 딸을 되찾아왔다. (많은 이라크 부유층들은 집안에 현금, 그것도 이라크 화폐인 디나르보다는 미국 달러를 보관하고 있다). 일부 납치범들은 그런 몸값을 반미 저항 게릴라 조직의 운영비로 돌린다지만, 그저 돈을 노린 범죄꾼들이 독자적으로 납치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치안 불안, 민간 보안업체 ‘특수’
이라크 치안 불안은 민간 보안업체들에는 ‘특수’를 뜻한다. 이라크에는 주로 미국의 민간 보안업체에서 파견된 많은 경호요원들이 활동 중이다. 이들 민간 경호원은 고객이 사무실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자동소총을 들고 근접경호에 나선다. 이들 민간 경호요원은 그린베레, 레인저, 델타, 해군 실을 비롯해 미군 특수부대 전역자들이 많다. 이들의 활동무대는 이라크뿐 아니다. 아프간, 콜롬비아, 보스니아 등 전세계 분쟁지역들에 퍼져 있다. 이라크 재건사업으로 폭리를 챙겨온 핼리버튼이나 벡텔 같은 미국 대기업들은 자체적으로 경호요원들을 채용한 상태다.
미국의 역대 행정부는 외국의 인질범들에게 미국 시민이 붙잡힐 때마다 “테러범들과의 흥정이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미국 정부의 납치와 몸값 요구에 대한 대응책은 원론적이지만 단호하다. △테러리스트에게는 어떠한 양보도 거래도 없고 △테러리스트는 반드시 법정에 세우며 △테러 지원국을 고립시키고 △우방국들에 테러 진압 능력을 기르도록 한다는 4원칙이다. 한마디로 인질범에게 양보 않고 몸값도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질의 가족들은 몸값을 지불하고서라도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구하려는 쪽으로 매달리게 마련이다. ‘인질산업’이 번창하는 비결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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