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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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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르토와 키신저

등록 2008-02-15 00:00 수정 2020-05-03 04:25

그의 죽음을 접하고 떠오른 인물… 동티모르 인구 3분의 1을 죽인 억압통치의 길을 튼 것은 키신저였네

▣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성공회대 겸임교수 kimsphoto@hanmail.net

20세기 정치사에서 독재와 부패를 상징하는 인물은 여럿이지만, 지난 1월27일 숨을 거둔 수하르토(1921~2008)는 최악의 인물로 꼽힐 만하다. ‘200만 명 투옥, 100만 명 사망’ 이란 말이 압축해 보여주듯, 수하르토의 32년 인도네시아 철권통치 기간에 숱한 사람들이 붙들려가 옥고를 치르거나 죽었다. 특히 1965년 당시 육군 소장이던 수하르토가 ‘공산주의자들’의 반란 음모를 진압한다는 구실로 좌익계 100만여 명을 숙청한 ‘피의 역사’는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참극으로 기록됐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수하르토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지난 2004년 수하르토를 세계 최악의 부패 지도자로 꼽으면서, 그가 32년 집권 기간에 무려 350억달러를 제 속주머니에 챙겼다고 비판했다.

일족의 검은돈만 제대로 거둬들였어도

인도네시아 현지 취재 때 들었던 인상적인 얘기 한 토막. 자카르타 공항에 내려 시내로 들어가는데, 택시 기사가 더듬거리는 영어로 통행료가 비싸다고 투덜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지나는 유료 도로의 통행료는 수하르토의 친척이 거둔다. 오늘 당신이 묵으려는 호텔도 수하르토 집안이 실제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당신은 수하르토의 축재에 일부 기여하는 셈이다.”

인도네시아에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가 몰려오면서 분노한 민중의 봉기로 수하르토가 물러난 뒤, 그의 가족과 친인척들은 호텔이며 쇼핑센터, 그리고 다른 알짜배기 기업들을 서둘러 팔아치웠다. 그러나 권력형 특혜와 부정축재로 끌어모은 그런 ‘검은 재산’은 한 푼도 빼앗기지 않았다. 1인당 국민총생산(GDP)이 3400달러(2007년 추산)인 가난한 나라에서 수하르토 일족의 검은돈만 제대로 거둬들였다면 국가 재정에 큰 도움이 됐을 법하다.

수하르토의 죽음 소식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인물 하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이력을 기회 있을 때마다 내세우는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다. 1970년대 리처드 닉슨 행정부와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미 외교안보 정책을 주물렀던 키신저와 수하르토의 결탁은 결과적으로 숱한 생목숨들을 앗아갔다. 1975년 동티모르 침공과 그 뒤의 무자비한 식민통치와 관련해서다.

동티모르는 1975년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 포르투갈의 정치변혁(이른바 카네이션 혁명) 바람을 타고 동티모르의 가톨릭계 지식인들은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ILIN)으로 뭉쳐 1975년 11월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 ‘독립’은 열흘도 채 못 갔다. 그해 12월 수하르토의 명령에 따라 인도네시아 해군은 동티모르의 중심도시 딜리에 함포사격을 퍼부었고, 1만 명 규모의 침공군은 가는 곳마다 살육을 벌였다.

1999년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의 굴레에서 벗어날 무렵에 벌어진 유혈사태를 취재하러 현지에 갔을 때 들은 얘기를 모아보면, 동티모르 사람들이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이란 표현으론 모자랄 정도다. 인권단체 ‘앰네스티인터내셔널’(AI)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억압통치 아래 24년 동안(1975~99) 약 20만 명에 이르는 동티모르 사람들이 인도네시아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60만 동티모르 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된 셈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사실 하나.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 전야에 미국은 동티모르 침공을 사전에 통보받았고, 인도네시아에 ‘푸른 신호등’을 켜주었다는 점이다. 1975년 당시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수하르토 대통령을 만난 바로 다음날 동티모르 침공이 이뤄졌다. 미국은 정보보고를 통해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하려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당시 키신저는 기자들에게 “미국은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베트남 수도 사이공이 함락된 1975년 당시 포드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은 동남아시아가 공산화될지 모른다는 이른바 ‘도미노 이론’에 집착하고 있었다. 키신저의 눈으로는 수하르토 장군의 인도네시아는 미국의 동남아 투자자본과 이익을 지켜주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지닌 반공의 굳건한 보루였다.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공을 눈감아준 것도 그런 논리에서였다.

‘반공 보루’에게 ‘공격 무기’를 제공하다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를 침공한다면 미제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1958년 맺은 미-인도네시아 상호방위조약은 미 원조로 받은 무기는 방어용으로만 쓰이도록 규정돼 있었다. 미 국무부 일각에서 미제 무기 사용의 법률적 문제를 입에 담자, 키신저는 이렇게 대꾸했다. “나도 법이 어떻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를 비난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이 될 수는 없지 않느냐.”( 1999년 9월7일치)

키신저는 미국의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독재자들과 손잡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칠레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군사 쿠데타를 뒤에서 도왔고, 이란의 독재체제 샤(Shah) 왕조를 지지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인도네시아는 1975년 동티모르를 강제 합병한 뒤 전세계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유엔에서는 여러 차례 인도네시아 비난 결의안이 통과됐다.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군이 물러나야 한다는 결의안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언제나 ‘기권’ 쪽으로 돌아서 수하르토의 뒤를 봐주었다. 수하르토가 저지른 여러 악행 가운데 동티모르 침공과 무차별 학살은 지구촌 평화주의자들에겐 잊지 못할 일이다. 그 뒤에는 역시 미국이 있었다.

##사진설명=동티모르 침공 계획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얻자마자 수하르토는 동티모르를 침공, 숱한 희생자를 낳았다. 인도네시아군에게 살육당한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동티모르 수도 딜리의 산타크루즈 공동묘지. (ⓒ김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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