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큰 전쟁’ 없는 폭력의 세기

등록 2007-12-14 00:00 수정 2020-05-03 04:25

2007년의 유엔평화유지군과 파병 수, 1948년 활동 시작한 이래 가장 많아

▣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정치학 박사kimsphoto@hanmail.net

2007년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의 지구촌은 평화로웠을까? 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구촌 어디에선가 테러나 유혈 충돌로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뉴스를 듣는 데 우리는 어느덧 너무도 익숙해졌다. 날마다 유혈 투쟁의 참혹상을 전해 들으면서 독자들은 과연 무슨 까닭에 우리 인간들은 유혈 투쟁을 벌이는가, 굳이 피를 흘려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가 하는 물음과 더불어, 전쟁으로 이득을 보려는 인간이나 세력들 때문에 전쟁이 그치지 않는 게 아니냐는 분노를 품게 마련이다. 석유를 노린 ‘더러운 전쟁’을 벌인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한 예이다.

유혈투쟁이 가장 많이 벌어진 곳은 아시아

2007년 지구촌 현실을 돌아보면, 이라크 유혈 사태를 비롯해 평화와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를 증명하는 하나의 통계자료가 있다. 유엔의 자료를 보면, 2007년 10월 현재 8만2천 명의 평화유지군(군인·경찰)이 레바논을 비롯해 전세계 17개 분쟁 지역에서 활동 중이다. 지난 2005년만 해도 푸른 헬멧을 쓰고 지구촌 분쟁 지역에 투입된 병력이 7만 명을 밑돌았다. 유엔 평화유지군의 파병 수로 보면, 1948년 유엔이 평화유지 활동을 시작한 지 거의 60년이 흐르는 동안 지금이 가장 많다.

국제평화와 군사 분야를 연구하는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해마다 펴내는 2007년판을 보면, 지난 2006년에 1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유혈 사건은 모두 17차례 벌어졌다. 2007년에도 이 수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구촌에서 가장 많은 유혈 투쟁을 기록한 곳은 다름 아닌 아시아 지역이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카슈미르·팔레스타인·레바논·필리핀 등 휘발성 강한 분쟁 지역이 아시아 지역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20세기는 유혈 폭력과 살상의 시대였다. 전쟁 연구자마다 추정치가 다르지만, 20세기의 전쟁 희생자 규모는 대략 1억 명에서 1억7천만 명 사이다. 무려 15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그 전쟁을 그냥 ‘큰 전쟁’(Great War)이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불과 20년 뒤 ‘더 큰 전쟁’(제2차 세계대전, 사망자 5천만 명)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영국 출신 작가로 1983년 으로 노벨문학상을 탔던 윌리엄 골딩이 20세기를 가리켜 “인류사에서 가장 폭력적인 세기”라고 규정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전쟁의 폭력성이 전투원인 군인들뿐 아니라, 비전투원인 민간인에게 더욱 강하게 휘둘러진다는 점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은 비전투원은 전투원인 군인 사망자보다 훨씬 더 많다. 정치학자 루스 시바드는 1900∼95년에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은 1억970만 명이며, 이 희생자들 가운데 비전투원(민간인)이 6200만 명으로 전투원보다 훨씬 많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 전반기의 전쟁 희생자 550만 명 가운데 75%가량이 비전투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신학자 제임스 터너 존슨(럿거스대 교수·종교학)은 민간인들에 대한 폭력이 판치는 국제분쟁이나 내전이 전세계 곳곳에서 늘상 벌어지는 모습이 사실상 ‘제3차 세계대전의 얼굴’이라고 규정했다.

전쟁은 그 폭력적인 성격상 온건하게 벌어지길 바라기 어렵다. ‘온건한 전쟁’이란 어법상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19세기 프러시아의 군사전략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도 그의 에서 “온건주의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논리적인 모순을 저지르는 일이다”라고 못박았다. 클라우제비츠는 “미개한 민족끼리 벌이는 전쟁이 문명을 이룬 민족끼리 벌이는 전쟁보다 훨씬 잔혹하고 파괴적”이라 했지만, 가장 문명화된 민족끼리의 전쟁도 폭력적임을 인정했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벌인 교전 당사국의 국민들은 그들 스스로가 ‘문명 국민’이라 여겼다. 이라크의 혼란을 불러일으킨 미국인들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쉽게 무너질 벽 ‘전쟁 희생자 2억 명’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 10월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이란의 지도자는 이스라엘을 파괴하려 한다.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하고 싶다면, 이란이 핵무기를 만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란의 긴장 때문에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고 보고 싶지는 않지만, 어떤 이유로든 큰 전쟁이 일어나는 일만큼은 피해야 한다. 20세기에 이미 두 차례의 큰 전쟁을 겪은 우리 인류가 과연 21세기에 제3차 세계대전을 맞이하게 될까.

앞서 20세기의 전쟁 희생자 규모는 1억 명에서 1억7천만 명 사이라고 했다. 석유를 노린 미국의 침공에서 비롯된 이라크의 혼란과 피바람에서 보듯이, 우리가 사는 21세기의 전쟁 희생자 합계가 2억 명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제3차 세계대전과 같은 또 다른 ‘큰 전쟁’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미국과 같은 패권국가가 힘에 의한 일방주의 대외정책을 21세기 내내 밀이붙이거나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쟁 희생자 2억 명’이란 숫자의 벽을 쉽게 넘어설 것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