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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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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를 위하여

등록 2007-10-19 00:00 수정 2020-05-03 04:25

그가 피살된 뒤 40년, 혁명가는 사라지고 반항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만 남았네

▣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성공회대 겸임교수kimsphoto@hanmail.net

지금부터 40년 전인 1967년 10월9일은 20세기 혁명사에서 기억될 만한 날이다. 그날 아르헨티나 출신 좌파 혁명가 체 게바라가 남미 안데스 산악지대에서 볼리비아 특수부대에 붙잡혀 총살당했다. 그의 죽음 뒤에는 당시 베트남전쟁으로 골치를 썩이던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이 도사리고 있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활동에 놀란 미국은 볼리비아가 ‘제2의 베트남’으로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해 볼리비아군을 훈련했고, 게바라 즉결 처형 결정에도 관여했다.

미국의 뒷마당에서 혁명을 꿈꾸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대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게바라는 평범한 젊은이였다. 1950년, 1953년 두 번에 걸친 남미 여행길에서 빈곤층 민중들의 고단한 얼굴들과 마주쳤다. 칠레 북부 추키하마타 광산을 장악한 미국 기업이 현지 노동자들을 노예 부리듯 다루는 걸 목격하면서 “나는 무식한 인디오(남미 원주민)가 될지언정 미국의 백만장자가 되진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1959년 쿠바혁명 성공 뒤 게바라는 지리적으로 남미 한가운데에 있는 볼리비아를 근거지 삼아 ‘미국의 뒷마당’ 중남미에서 그의 말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변혁’을 꿈꾸었다.

의사가 되려던 20대 중반의 게바라에게 두 번에 걸친 긴 여행은 냉혹한 현실에 눈을 뜨도록 만든 촉매제였다. 남미 사회 곳곳에 퍼진 가난과 질병, 사회적 모순, 가진 자의 오만과 착취, 정치적 압제 아래 고통받는 민초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볼리비아에서의 게릴라 활동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1개월 만에 막을 내렸고, 그가 추구했던 사회변혁의 꿈은 꺾였다. 그렇지만 39살이란 한창 나이의 게바라(1928년생)가 세상 사람들에게 남긴 이미지는 아직도 강렬하다. 친미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낸 뒤 스스로 권력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떠났던 게바라는 쿠바에선 국민적 영웅으로 받들어진다. 해마다 그의 생일(6월15일)과 기일(10월9일)이 다가오면 쿠바 곳곳에선 그를 기리는 행사들이 어김없이 벌어진다.

쿠바에서 게바라는 매우 중요한 교육 자료다. 쿠바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는 체 게바라처럼 개척자가 되리라”고 다짐한다. 게바라의 혁명동지이자 쿠바 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의 어록을 빌리자면, 게바라는 존경을 넘어 배움의 대상이다. “앞으로의 세대가 어떤 유형의 인간을 바라는지에 대해선 우린 이렇게 말해야 한다. ‘체 게바라를 닮아라!’ 어린이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우린 서슴없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체 게바라의 정신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이다.”

혁명의 꿈이 꺾인 채 게바라가 눈을 감은 지 40년이 지난 지금은 21세기. 사회주의혁명의 모국이던 소련이 분해된 지도 벌써 16년이 지났다. 유일 초강국인 미국의 세계패권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가 지구촌을 지배하는 시대가 됐다. 마르크스-레닌 철학을 전공한 교수들이 전세계적으로 일자리를 잃고, 관련 서적들은 도서관에서 찾은 이들도 없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상황이다. 게바라가 추구했던 사회주의혁명의 시대가 다시 올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10년 전 볼리비아에서 쿠바로 유해가 옮겨져 산타클라라의 혁명공원에 잠든 게바라에게 위안거리가 있다면, 그가 혁명을 수출하려 애쓴 중남미에서 좌파 정권들이 줄줄이 들어섰다는 점이다. 쿠바에 이어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에콰도르, 우루과이 등이 그러하다. 같은 좌파 정권이라 해도 반미 노선을 분명히 하는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가 있는가 하면 이른바 실용적 좌파 정권이 들어선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등이 있다. 강경좌파든 실용좌파든, 중남미에 좌파 정권이 많이 들어서기는 게바라가 죽던 40년 전엔 상상하기 어렵던 일이다. 페루와 볼리비아, 쿠바에서의 현지 취재에서 확인한 사실이지만, 그곳 유권자들의 정서는 대체로 미국을 곱게 보지 않는다. “중남미가 더 이상 미국의 정치경제 패권에 휘둘리는 뒷마당이 돼선 안 된다”는 생각들이다.

시가를 입에 문 할리우드 꽃미남

현실을 돌아보면, 같은 게바라를 받아들이는 데 사람마다 많은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다. ‘정치적 지향점으로서의 게바라’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의 게바라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상품화된 게바라’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그의 브랜드라 할 별 달린 모자를 쓰고 다닌다. 목걸이, 시계, 재떨이에도 게바라다. 맥주 선전 포스터에도 게바라가 등장한다(실제로 게바라는 고질병인 천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줄담배를 피우긴 했지만, 술은 잘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젊은 여인들은 가슴에 게바라의 얼굴을 문신으로 새겨넣곤 한다. 몸매를 훤히 드러내는 수영복에 게바라의 얼굴을 박아넣을 정도다. 혁명은 탈색되고 그저 반항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로서의 게바라만 남은 모습이다.

여기서 생겨나는 물음. 게바라 수영복를 입고 다니는 여인들은 그를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을까.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중남미 친미 독재정권의 군대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며 불꽃같은 삶을 산 혁명가 게바라가 아닌, 시가를 입에 문 또 다른 할리우드 꽃미남을 따르는 것은 아닐까. 게바라 피살 40주년을 맞아, 그가 고민했던 사회변혁의 치열한 문제의식과 시대정신의 무게를 우리는 지금 얼마만큼 나눠갖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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