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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무기’는 왜 약자를 겨냥하는가

등록 2007-08-17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테러는 지구촌 저항세력의 전술, 그러나 한국인 인질은 패권전쟁 패배자의 희생양</font>

▣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정치학 박사kimsphoto@hanmail.net

아프가니스탄 반미 저항집단인 탈레반 잔존세력에게 납치된 한국인 종교인들의 고난이 쉽게 끝나지 않고 있다. 아프간 침공의 주역인 미국 부시 대통령은 물론이고, 지난날 미국 에너지 기업 유노칼의 로비스트였던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의 친미 아프간 정부도 한국 인질의 안전에는 무심한 태도를 보여 우리 국민을 화나게 만들었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탈레반 죄수 맞교환으로 사건을 푸는 열쇠는 아프간의 현실적인 무게중심인 미국이 쥐고 있음에도 나 몰라라 하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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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은 테러리스트, 한쪽은 자유전사

외신을 보면, 탈레반은 21명의 한국인 인질 석방 조건으로 한국 쪽에 미국 정부가 동료 탈레반 죄수의 석방에 동의하도록 도와줄 것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미 부시 행정부의 입장은 “테러 분자들에게 양보는 없다”는 원론적인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이다. 그런 가운데 시시각각 한국인 피랍자들의 건강은 악화되고, 탈레반은 추가 처형 위협을 흘리고 있다.

여기서 생겨나는 궁금증. 만일 피랍자들이 한국인이 아니고 미국인들이었다면 어땠을까? 미국 시민 23명이 납치된 상황에서 그 가운데 2명이 처형됐다면 미국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그래도 “테러 분자들에게 양보는 없다”는 원론적인 주장을 고집했을까? 미국 의회로부터 이라크 철군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는 혹시나 아프간의 친미 정권과 더불어 한국인 피랍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위기의 피랍 한국인들을 내버려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23명이 납치돼 2명의 희생자를 낸 탈레반의 한국인 피랍 사건은 테러의 개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테러리즘이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담긴 상대적인 용어다. A편에게 테러는 B편에게 자유와 독립을 위한 정당한 투쟁으로 받아들여진다.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활동하는 무장 게릴라는 인도 쪽으로 보면 ‘테러리스트’, 파키스탄 쪽에서 보면 ‘자유전사’다. 마찬가지로 ‘테러와의 전쟁’이란 용어도 실상은 한쪽만의 일방적인 용어다. 그 반대편에 선 세력의 시각에선 ‘민족독립 투쟁’이자 ‘자유를 위한 투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파생되는 물음. 탈레반은 미국이 말하는 바대로 ‘테러와의 전쟁’에서 토벌 대상인 테러집단인가다. 9·11 동시테러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탈레반은 아프간의 합법적인 통치 권력이었다. 그러나 지난 2001년 9·11 테러 뒤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라덴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미국의 침공을 받아 정권을 빼앗겼다. 이후 탈레반은 비합법 게릴라 투쟁조직으로 변해갔고, 탈레반의 투쟁 목표는 9·11 이후 외세(미국)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잃었던 정권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미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밀려 아프간 변방 산악 지역을 떠돌지만, 탈레반은 스스로를 테러집단으로 여기지 않을 게다. 아프간을 외세의 침공에서 지켜내려는 무자헤딘(이슬람 전사)으로 자리매김할 터다. 그들의 눈에는 한국은 군대와 종교인을 보내 미국의 아프간 침공과 점령 정책을 도와주는 들러리 국가로 비칠 것이다. 그리고 지금 탈레반 죄수를 풀어주지 않으면 한국인 인질들을 더 죽이겠다고 위협 중이다. 물론 납치의 명분이야 어떠하든, 한국인 피랍 사건은 우리에겐 분명히 테러 사건이다.

흔히 테러는 ‘약자의 무기’라 일컫는다. 지구촌의 여러 저항집단은 그들이 지닌 저항 수단이 ‘테러’ 말고는 마땅한 게 없다고 주장한다. “무장력에서 압도적인 국가조직(정규군과 경찰)에 맞서려면 테러는 불가피한 폭력”이라는 논리다. 테러의 노림수는 힘(군사력)의 열세를 메우고 강한 적으로부터 양보를 받아내는 것이다. 전술로만 따진다면, 테러는 교전 당사자의 한쪽이 군사력에서 적에게 크게 뒤지는 이른바 ‘비대칭 전쟁’ 상황에서 쓰이는 극한 전술이다. ‘약자의 무기’로서 테러 전술을 적극 활용해온 대표적인 저항조직이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다. 지난 2004년 봄 이스라엘 군 헬기 미사일에 숨진 하마스 지도자 압델 아지즈 란티시는 “우리 하마스가 지닌 저항수단으로 ‘순교 작전’ 말고는 마땅한 것이 없으며, 이는 이스라엘의 강력한 첨단무기에 대항하는 약자의 전술”이라고 주장했다.

차량 폭탄테러 희생자는 거리의 보통 사람

여기서 한 가지 답답하고 심각한 문제점이 떠오른다. 지구촌 저항세력이 테러를 ‘약자의 무기’로 활용하면서도, 정작 많은 경우 그 테러의 대상이 마찬가지로 약자인 민초, 즉 보통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라크에서 거의 날마다 생겨나는 차량 폭탄테러의 희생자들도 침략군인 이라크 주둔 미군이 아니다. 바그다드 거리의 보통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이나 북아일랜드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테러 희생자도 경찰이나 군 병력이 아니라 거리의 보통 시민들이었다.

탈레반에 인질로 잡혀 있는 21명의 한국인도 탈레반 납치 테러의 희생자들이다. 약자를 희생양 삼아 동료 죄수를 풀어주라고 협박하는 모습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 인질 테러는 더 이상 ‘약자의 무기’가 아니다. 탈레반은 미 부시 행정부가 9·11 테러를 빌미 삼아 미국의 이익 확장을 위해 21세기에 들어와 벌인 패권전쟁(아프간전쟁·이라크전쟁)의 패배자이지만, 한국인 인질들은 그 패배자의 희생양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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