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에서 열린 정의구현전국사제단 30돌 기념 행사… 안중근 의사 재조명으로 남북 교류 일궈
▣ 금강산= 글 · 사진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지난 8월23일 오후 5시쯤 북쪽 고성항 출입국관리소(CIQ). 굳은 표정으로 꼬장꼬장하게 금강산 관광단을 맞이하던 북쪽 관리원들의 낯빛이 환해졌다. 한 여성 관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은색 등산복을 입은 초로의 관광객 손을 덥석 잡았다. 마치 오랜만에 친정 아버지를 만난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감격해하는 모습이었다. 출입국 수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것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두 사람은 붙잡은 손을 내려놓을 줄을 몰랐다. 관광객들은 일순간 긴장을 풀고 남북이 맞잡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초로의 관광객은 15년 전(1989) 평양으로 가서 판문점을 통해 전대협 대표로 방북한 임수경씨를 데리고 왔던 문규현 신부였다.
15년 전 판문점 넘은 뒤 지속적 교류
“그땐 정치적 박해를 각오하고 분단의 장벽을 넘었지요. 당시 방북했을 때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주민과 함께 미사를 올린 남다른 경험도 있습니다. 그동안 천주교의 남북 교류가 활발히 이뤄져 공동 미사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금강산에서 남북의 신도들이 손을 맞잡고 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해 아쉽네요. 통일운동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야 할 때입니다.”
문규현 신부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아래 사제단) 대표로서 사제와 평신도 340여명으로 이뤄진 1차 관광단과 함께 금강산을 찾았다. 이들은 숙소인 금강산 호텔에서 미사를 올리고,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영화 을 관람하는 등 북녘 땅에서 다채로운 행사로 사제단 창립 30주년을 기념했다.
애당초 사제단은 남북이 함께하는 기념행사를 가지려고 했다. 지금까지 사제단은 통일을 주요 과제로 삼고 다양한 형식으로 남북 교류를 꾀했다. 문규현 신부를 평양에 보내면서 성직자는 제국주의 앞잡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뒤 사제단은 분단의 고리를 끊으려는 통일운동에 힘을 보태면서 한편으로는 일상적 교류를 추진해왔다. 남북의 신도들이 평양의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올린 뒤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고, 중국 땅에서 안중근 의사의 활동을 재조명하기도 했다. 그런 성과를 사제단 창립 30주년에 모으려는 것은 당연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흐트러진 남북 관계는 천주교의 교류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쪽은 정치적인 이유를 내세워 공동 행사 참석이 어렵다고 밝혀왔다.
정의로운 세상을 실현하려는 사제단이 평화와 통일을 화두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제단은 30년 전 지학순 주교의 불법 연행 과정에서 잉태됐다. 당시 전국의 사제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민주주의 유린에 항거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제단을 결성한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유신독재를 말하지 않던 시기에 서슴없이 박정희 정권을 고발했다. 함세웅 신부(서울 제기동성당 주임신부)는 “인혁당 사건 희생자 가족을 만나고, 끌려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불의한 권력을 타파하는 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 생각했습니다. 독재에 의한 탄압은 결국 분단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죠. 분단의 사슬을 잘라내야만 완전한 민주와 자주가 가능하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고 말한다.
현재 북쪽에는 천주교 신자가 3천명가량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 한국전쟁 이전에 영세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가톨릭협회 중앙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다. 대부분의 북쪽 주민들이 성서나 십자가, 묵주 등을 제국주의 도구라 여기기에 제대로 성체를 준비한 미사를 드리기는 힘들다. 기껏해야 성당에 모여 성서를 읽고 기도를 드릴 뿐이다. 그것도 민간교류 활성화에 따른 결실이었다. 요즘은 사제단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면서 남쪽 사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예컨대 6·15 남북 공동선언 이전에 북쪽을 방문한 사제를 부를 때 신부 선생이라 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신부님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안중근 세미나, 2000년 10월부터 수차례
사실 사제단이 추진하는 남북 교류는 통일이라는 대의를 빼면 그다지 통할 구석이 없어 보인다. 북쪽에 신부와 수사, 수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공통된 관심사가 별로 없어 보이는 남쪽 사제단과 북쪽의 관계자들이 서로 통하는 지점에 안중근 의사가 있다.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만방에 알리려 하얼빈역에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의사는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은 가톨릭 신자였다. 하지만 안 의사는 살생을 금하는 교리를 어겼다는 이유로 제명당해 90년 넘게 가톨릭 신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0년 12월에 사제단이 중심이 되어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쇄신과 화해’라는 과거사 반성문에서 안 의사를 복위시켰다.
이를 전후로 남과 북의 천주교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이미 북쪽에서는 지난 1979년에 영화 (백두산창작단 집체작)를 만들 정도로 안 의사의 항일운동을 기려왔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서슴없이 바친 것을 높이 평가하는 북쪽에서는 32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안 의사의 유해를 찾아나서기도 했다. 이런 안 의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바탕으로 조선가톨릭협회는 남쪽의 사제단과 공동 행사를 마련하기도 했다. 지난 2000년 10월 중국의 하얼빈에서 열린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 세미나는 두 조직이 함께 마련한 안 의사에 관한 첫 번째 성과였다. 그 뒤로 평양과 대련 등지에서 안 의사 관련 세미나를 잇따라 열었다.
사제단은 금강산 평화통일 기원미사를 준비하며 북쪽 온정리 주민과 함께하는 영화 의 시사회를 마련하려고 했다. 이는 사제단 소속 신부들을 주축으로 결성한 안중근 기념사업회 사람들이 나섰다. 처음에는 곧바로 평양 시사회까지 성사될 듯했다. 하지만 남북 관계가 꼬이면서 평양 시사회는 물론이고 사제단이 마련한 금강산 미사를 앞두고는 온정리 주민 시사회까지 무산됐다. 결국 지난 23일 저녁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열린 영화 시사회는 남쪽 관광객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금강산 호텔 등지에서 일하는 북쪽 사람들도 안 의사에 관한 남쪽 영화에 관심을 보였지만 끝내 은 남북 주민의 만남을 주선하지 못했다.
통일을 화두로 삼은 사제단의 금강산 미사에는 특별한 사람이 동행했다. 바로 사제단 결성 과정에 힘을 보태고 인혁당 관련 인사 사형 판결에 항의하다 추방당한 제임스 피터 시노트 신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해외민주인사 초청으로 2002년 10월에 국내에 들어온 시노트 신부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지부 상주 사제로 서울에 머물고 있다. 얼마 전 1960년부터 15년간 영종도에서 사목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역사소설 (성바오로 펴냄)을 펴내기도 한 시노트 신부의 사제단에 대한 기대는 시사적이다. “여전히 사제단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사제단이 남북의 힘을 모아 미국의 입김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국제연대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시대적 소명 다하겠다”
민주와 인권 그리고 통일로 이어온 사제단의 30년 여정. 그 과정에서 19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실상을 고발하며 6월항쟁의 도화선 구실을 했고 미선이·효순이 사건 때는 장기 단식으로 국민적 분노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사제단의 구실이 예전 같지 않은 게 사실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제단의 발언에 힘이 실리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아 사제단의 미래를 준비할 수밖에 없다. 함세웅 신부는 “안으로는 교회 개혁에 나서면서 밖으로는 시대적 소명을 바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제단은 오는 10월11일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하고 역사 속에서 새롭게 모임을 다져나갈 예정이다. 끊임없이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현실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게 사제단의 존재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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