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오프 5차전. 5-0으로 뒤처지다 5-5를 만들어놓은 삼성 라이온즈의 11번째 공격. 이미 땀 범벅인 두산 투수 임태훈의 투구. 아웃카운트 단 한 개를 남겨놓은 만루. 야구만화에서 만들려고 해도 만들지 못할 극적인 장면이 눈앞에 (정확히 말하면 브라운관 너머에서) 펼쳐지고 있다. 표현 능력이 아쉽지만, ‘극본 없는 드라마’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이렇듯 가을 전어보다 더 맛나다는 가을 야구가 밤 10시를 넘어 펼쳐질 때, 저 건너 채널에서는 (이하 )가 시작되고 있다. 거짓말 좀 보태, 생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드라마. 하지만 나는 박석민의 타석을 남겨두고 과감히 11번으로 채널을 바꾼다. 황인뢰표 드라마, ‘국민 선배’ 김현중, 인기 절정의 일본 만화, 대만의 히트 드라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그 패인을 탐구하기 위해서.
외주제작이니 ‘총체적 엉망’인 방송사 문제는 아닐 텐데, 도대체 왜? 중간에 작가가 바뀌어 그야말로 ‘극본 없는 드라마’였단다, 감독이랑 누구랑 싸웠다더라… 언제나 그렇듯 여러 소문이 있고, 감탄할 만한 분석도 이미 다 나와 있지만, 온갖 실망에도 불구하고 13회를 모두 시청한 내가 보기엔,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처음부터 이 만화를, 그리고 그 속 인물들의 심리를 무시한 게, 바로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이 만화의 여러 요소 중 예쁘기만 한 10대 취향 판타지에 초점을 맞추고, 예전 드라마 의 인기 비결 역시 그런 아기자기함에 있었다고 쉽게 본 나머지 예쁜 소품과 화면을 그대로 가지고 오는 게으름. 그리하여 둔하기는 하지만 진심으로 사람을 좋아할 줄 아는 여자 주인공 고도코는 앞뒤 가리지 않는 진정 민폐형 여주인공으로, 차갑기는 하지만 속 깊은 나오키는 도무지 일관성 없는 왕자병 환자로 변했다.
제작 환경도 안 좋아 보였던 대만 드라마 이 화제가 된 것은, 눈치 없는 샹친(여주인공)을 빼고는 모든 사람이 즈슈(남주인공)의 마음이 어떤지, 어떻게 변해가는지 볼 수 있었고, 천천히 샹친도 그걸 알게 되는 과정을 즐겼기 때문이다. 드라마 의 성공 역시, 많이 외로운 황태자 신이와 그 외로움을 알아보고 따뜻하게 안아준 채경이 때문에 터무니없는 설정과 비현실적 미모 너머, 그 외로움을 알고 따뜻함을 그리워한 누군가는 공감하고 때로는 빙의까지 했기 때문인데.
반면 에서 백승조는 단순히 표현을 잘 못하거나 하니만 눈치를 못 채는게 아니라, 줄거리를 다 알고 있는 사람조차 그 마음을 알 수 없는 변덕쟁이가 되었다. 그게 과연 김현중만의 잘못일까.
볼 때마다 더 실망하게 될까 마음을 졸였는데, 어느덧 종영이란다. ‘빙의’나 ‘공감’은 꿈도 꾸지 못하더라도 상상력을 총동원하면 승조와 하니의 속내를 짐작이나 할 수 있을지, 솔직히 그조차 자신이 없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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