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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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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 ‘문명충돌론’은 유령이라오

등록 2003-12-12 00:00 수정 2020-05-03 04:23

무슬림과 크리스천의 경계에 선 힌두 지식인이 보내는 크리스마스 카드

리처드에게.

‘즐거운 성탄과 행복한 새해를!’

올해는 정말 지독한 한해였네! 진짜로 우리 좀 쉬어야겠지? 무슬림의 이둘 피트르(Ei-dul-Fitr)가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군. 이 경사스러운 날들을 두고도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른 국가와 인종과 종교를 내걸고 불쾌한 폭력이 난무하니,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걱정이라네.

참, 무슬림이 금식월이라고 부르는 라마단을 너희쪽 미국 크리스천들이 치르는 추수감사절과 비슷한 의식이라 불러도 되겠지 물론 조지 부시가 몰래 이라크로 가서 칠면조 요리 먹고 2시간30분 동안 군인들과 사진 한판 찍고 사라지는 그런 감사절을 일컫는 건 아니고.

오, 신의 응징!

하도 답답해 혼자 이런 상상을 해봤다네. “조지부시가 ‘이둘 피트르’ 한 이틀 전쯤 바그다드에 내려 시민들과 어깨 치며 함께 거리를 돌아다닌다면 어땠을까?”

그이에게 그런 감각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렇다면 그런 걸 건의하지 못하는 보좌관이란 자들은 어때? 그들은 이라크 무슬림들에게 이둘 피트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단 말인가?

부시가 그런 ‘몸짓’ 한번으로 이라크 시민들에게 호의를 전하면, 승전을 선언하고도 일곱달이 넘도록 싸우고 있는 파멸적인 이라크 상황을 좀 돌려놓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 보좌관들이 이라크 공격작전 코드네임 ‘신의 응징’(Infinite Justice)을 만든 자들이구만. 그렇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네.

말이 난 김에, 그 조물주(infinite)란 건 크리스천 신학에서 신성한 대우주라든지 신의 전지전능함을 묘사한 거겠지 조지 부시가 처음부터 ‘십자군’이란 말도 했으니. 이거, 아예 중세로 돌아가야겠군!

리처드 넌 어떻게 생각해? 그 보좌관이란 자들은 크리스천들이 지난 수세기에 걸쳐-사실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지만- 무슬림을 유럽에서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해왔던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오, 그러고 보니 펜타곤이 ‘신의 응징’에서 ‘항구적인 자유’(Enduring Freedom)로 작전명을 바꿨지? 이미 다 두드려 엎고 난 뒤였지만 말야.

요즘 무슬림 친구들을 만나보니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조지 부시를 두고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더군. 만약 부시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군부나 업체들에게 이문을 남겨주려는 게 아니었다면, 분명히 크리스천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종교적 배경을 지닌 행위였다고 보는 거지. 조지 부시가 하청업자이자 같은 신을 둔 토니 블레어에게는 정확한 내막을 털어놓았을까?

그리고 제리 보이킨 육군준장, 왜 그 펜타곤 관리인지 국방성 부부장관쯤 되는 인물 있지? 그이가 소말리아 전쟁 군주들과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건 크리스천인 자신의 신이 ‘알라’보다 훨씬 더 세고 크고 높고 강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탓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종교자유의 천국이라는 미국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인물이 아직도 쫓겨나지 않을 수 있어? 어떻게 이런 근본주의자가 아직도 펜타곤에서 계속 일할 수 있냐는 거지.

아무튼 이런 일련의 흐름들로 봐서 부시가 이슬람 세계에 던진 메시지가 있단 말이야.

‘문명충돌’이라는 걸 공공연히 내세우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아왔는데, 자네가 볼 때는 어때? 만약 그렇다면 크리스천 서양이 반드시 이슬람 동양(또는 중동)을 깨부순다는 결론이겠지?

이건 지난번 자네가 내게 보낸 편지에서 이 세상을 걱정하며 넌지시 그 문명충돌론에 공감하는 듯한 인상을 풍겼기 때문에 내 생각을 담아보내는 걸세.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른바 그 ‘문명충돌론’이란 걸 얼토당토않은 야바위쯤으로 여기고 있다네. 거기엔 논리도 없어. 굳이 무슨 ‘론’이라고 붙이기마저 불가능해.

그 ‘놀라운 비약’이 황당할 뿐

지난 20세기를 한번 되돌아보세. 자네도 알다시피, 20세기 인류는 서구 자본주의와 동구 공산주의를 중심축에 놓고 충돌해왔다네. 그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대립구조를 기본에 깔고, 각 지역이 지닌 사회적 성격에 따라 어떤 곳에서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투쟁으로, 또 어떤 곳에서는 반독재 정치투쟁으로, 또 어떤 곳에서는 반식민지 투쟁으로 불거져나왔던 거지. 게다가 동북아시아 한국에서부터 남아프리카 앙골라와 남아메리카 칠레에 이르기까지 판쳤던 대리전도 사실은 그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틀에서 비롯되었고.

그러다가 소비에트가 무너지면서 옛 냉전체제가 함께 쓰러지는 사이에 잠시 동안 ‘적’을 잃고 방황하던 장엄한 무장대국 미국이 여전히 ‘전쟁준비완료체제국가’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이들, 주로 대규모 군산복합체와 관련된 자들이 수조달러에 이르는 돈줄을 놓치기 싫어서 들고 나온 게 그 말 같지도 않은 문명충돌론이란 말일세. 그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 그 전쟁으로 이문을 남기는 자들에게 싸울 적이 필요했던 것이고, 옛 냉전이 무너진 뒤 마땅한 적을 찾는 과정에서 이슬람을 지목했다는 뜻이지. 그렇게 하려니 논리가 필요했고, 그래서 느닷없이 문명충돌론이란 걸 뽑아들었던 거지. 그 논리는 이슬람말고도 ‘북조선’을 유교권으로 묶어 처음부터 적으로 규정해놓고 출발했지. 한쪽엔 이슬람, 다른 한쪽엔 북조선. 그래서 미국은 세계 전쟁전략을 양쪽을 동시에 까는 ‘윈윈’이라고 이름 붙여 들고 나왔고.

자네는 미국이 제국주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서양의 세계 지도자로 군림하기 위해서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적을 창안해냈다는 생각을 해보았는가? 한때 적이었던 공산주의를 대신할 적으로 이슬람을 말일세. 그게 우리쪽에서 보는 문명충돌론의 본질일세.

‘서양 자본주의’가 어떻게 1990년대 초 갑자기 ‘서양 크리스천’으로 둔갑해버릴 수 있어?

그 문명충돌론에 따르면 말이야. 그렇다면 이전 동구 사회주의는 동구 무슬림이 되어야 하는데! 놀라운 비약이지. 따라서 우린 그런 걸 무슨 ‘론’으로도 불러주지 않는다는 거야.

아무튼 ‘새뮤얼 헌팅턴류’ 유령이 요즘 들어 다시 부쩍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인데, 그 유령들이 말하는 문명이란 건 대체 뭔가? 어째서 그 유령들은 문명이란 걸 오직 종교로밖에는 보지 못하는지. 다 접어두고, 문명을 그 유령들 뜻대로 종교로 봐도 또 농담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야. 크리스천 미국과 크리스천 러시아가 70년이 넘도록 마찰을 빚고 있으니! 또 반이 넘는 중동분쟁이 사실은 무슬림과 무슬림 사이의 다툼인데, 게다가 또 긴 역사적 전통을 지닌 제국주의를 향한 반제국주의 투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종차별 반대투쟁, 요즘 벌어지고 있는 세계화 반대투쟁들, 이런 건 또 어떤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일까?

이스라엘의 무슬림을 아시나요

그래서 내 말은 미국 군사주의자들이 들고 나온 그 정치적인 문장인 문명충돌론을 들고 돌아다니는 유행은 선입견과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일세. 민족과 인종 그리고 국가라는 현대적 요소들이 과연 종교 앞에서 흐릿해지고 말까?

가장 심각한 유혈충돌 가운데 하나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과연 유대와 무슬림 사이의 대결일까? 그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팔레스타인 가운데도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있단 말일세. 팔레스타인들에게는 자신들 땅을 훔친 이스라엘을 향한 영토회복과 독립투쟁이지, 빼앗긴 이슬람을 되찾기 위한 종교해방투쟁이 아니란 거지. 이스라엘을 놓고 봐도, 전체 인구 가운데 약 20%는 아랍계 무슬림이란 말야. 이 무슬림들이 앞으로 15년쯤 뒤에는 이스라엘 인구분포에서 주류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고.

리처드, 이 세상은 온갖 상투적인 것들을 놓고 거래하고 있다네. 예컨대 무슬림 남자는 아내 넷을 데리고 산다거나, 무슬림 여성들은 모두 전통 히잡(Hijab)을 걸치고 다닌다는 식으로 말일세. 얼마 전 한 학자가 그 히잡이 무슬림 전통복장이 아니라는 새로운 근거를 들고 나왔단 말이야. 그건 19세기 정숙과 거리감을 강조하기 위해 차려입었던 서양 여성들 복장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더군. 또 최근 1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같은 교육·사회·경제 조건을 놓고 본다면 무슬림 여성들이 힌두 여성들보다 오히려 더 사회진출 비율이 높다고 하더군. 일부다처제는 힌두 남성들이 오히려 무슬림 남성들보다 더 많고. 가정에서의 결정권도 무슬림 여성들이 힌두 여성들보다 더 큰 것으로 드러났다네.

오늘 내 이야기의 결론은, 우리가 편견을 버리고 이슬람을 새롭게 보자는 뜻이라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분쟁들이 사실은 종교 탓이 아니라는 말이지. 특히 이슬람이라는 종교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 않다는 걸 유심히 보자는 말이지. 부의 불평등한 분배, 자연을 약탈하는 자본, 독점적 정치 형태, 제국주의 전쟁 숭배 같은 것들에 맞선 저항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단 말일세.

거기 어디에도 흔히 유행하는 ‘문명충돌’ 증거나 징후는 없다네. 그래서 미국이 아프가니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걸 크리스천과 이슬람 대결로 몰아가는 걸 우리는 세계 시민 입장에서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말이지. 힌두 인도의 보통 시민인 내가 크리스천과 무슬림 사이를 오가며 했던 말이라 중립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 농담이네.

리처드,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이해 자네와 가족 모두에게 건강한 미소가 깃들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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