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앞줄 오른쪽)과 일함 카드리 사이언스코 최고경영자가 2025년 2월26일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열린 ‘유럽 산업 정상회의 2025, 청정산업딜' 행사에서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REUTERS
한국 석유화학산업은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한때 수출과 지역경제를 이끌던 산업은 구조적 침체와 생존의 기로에 놓였다. 글로벌 공급과잉, 중국의 자급률 상승, 그리고 화석연료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이 한꺼번에 몰아치면서 전남 여수와 충남 서산 대산, 울산 등 주요 산업단지에 경고등이 켜졌다.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의 핵심 육성 사업으로 선정된 뒤 빠른 성장을 이룬 석유화학산업은 지난 60년간 글로벌 경기 변동에 따라 호황과 불황 사이클이 반복됐다. 이번 석유화학산업의 실적 부진도 초기에는 침체 상황을 일시적 조정 국면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2022년 시작된 석유화학업체들의 실적 부진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실적 부진의 주된 이유는 2020년대 들어 중국과 중동이 석유화학 설비를 본격적으로 증설하면서 글로벌 석유화학 시장의 공급과잉이 점차 심화했기 때문이다. 수급 균형을 기반으로 유지된 시장 질서는 사실상 붕괴했다. 글로벌 석유화학산업의 경쟁 구도는 가격 중심의 과잉 경쟁 체제로 재편됐다.
특히 중국과 인접한 한국은 그간 중국 경기 성장세에 힘입어 수출 확대의 수혜를 입어왔으나, 중국의 석유화학제품 자급률 상승으로 수출 기반이 크게 약화했다. 한국무역통계에 따르면, 석유화학 주요 3대 최종 제품 기준 대중 수출 비중은 2020년 36%에서 2024년 26%로 하락했다.
중국의 급격한 성장에 대응하지 못한 한국 석유화학산업은 대기업을 시작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다. 석유화학의 기초 화합물을 생산하는 나프타분해(NCC) 설비를 보유한 국내 대형 석유화학업체 9개사의 석유화학 부문 합산 영업실적은 2022년 3893억원에서 2023년 -641억원으로 적자 전환한 데 이어, 2024년 -1조1722억원으로 영업적자 폭이 크게 확대됐다.
더 큰 문제는 석유화학업체들의 누적된 실적 부진이 여수와 서산, 울산 등 주요 석유화학단지 지역의 지방세 수입 급감으로 직결되며 지역경제 기반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중국에 경쟁력을 상실한 범용 제품 중심의 생산구조를 가진 여수는 2024년 지방세 징수율이 전년 대비 26.8% 감소했다. 석유화학산업의 지속가능성이 지역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된 셈이다.
석유화학산업 위기의 여파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자, 산업통상자원부는 2024년 12월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업 재편과 전환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성을 제시하지 않은 채 공급과잉 해소를 기업들의 자발성에 맡기는 접근 방식을 취했다. 실효성 있는 대책으로 평가받지 못한 이유다.
석유화학산업은 대형 장치산업이다. 나프타분해 설비의 설비당 투자 규모는 2조~3조원 수준으로 추정된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투자 여력이 부족한 업체들이 손실을 감수하며 기존 설비를 포기하고 신규 투자를 감행하기 어렵다. 이에 각 지역은 자구책을 강구하고 있다.
여수의 경우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을 신청해 2025년 5월 지정됐다. 이에 2년간 긴급경영안정자금과 지방투자촉진보조금, 정책금융 등 각종 지원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경쟁력 회복보다 지역경제의 일시적 연명에 초점을 맞춘 임시방편적 처방이다. 주요 설비들의 가동이 중단되고, 2024년 투자 금액이 전년 대비 80% 이상 감소한 여수산단은 사실상 생존을 위한 마지막 대응 단계에 놓여 있다. 지속 가능한 산업단지, 지역경제를 위한 새로운 전환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신규 투자를 끌어내고 경쟁력을 회복할 해법은 탈탄소 기반의 청정 화학으로의 전환이다. 글로벌 석유화학 시장에서 공급과잉과 함께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변화는 탄소국경조정제도와 각국의 저탄소 규제 강화로 대표되는 탄소 중심의 무역 질서 재편이다. 주요 시장인 유럽연합(EU)과 미국 등도 탄소 집약도가 높은 석유화학제품에 점점 더 엄격한 규제를 적용할 예정이다. 결국 최종 소비재부터 중간재까지 제품의 탄소발자국 수준이 수출 경쟁력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더 이상 원가 경쟁력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승부를 보기 어렵다. 더 늦기 전에 저탄소 전환 기술을 통해 새로운 경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
그간 석유화학산업은 에너지 다소비와 고탄소 산업이라는 특성 탓에, 탄소배출 저감을 비현실적인 과제로 여겼다. 그러나 석유화학산업의 탈탄소 전환 기술은 이미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기술 유무가 아니라, 이를 실행에 옮기는 산업의 역량과 정책적 지원 체계를 갖추는 일이다. 현재 석유화학업계는 폐플라스틱 재활용 원료 생산과 ‘이산화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클러스터 구축 등 일부 분야에서 자체적인 투자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이는 규제 완화와 초기 수요 창출만으로도 상용화를 이룰 수 있다.
전기가열로나 메탄 열분해 수소 생산, 산업용 히트펌프 등은 투자 부담으로 기업들의 단독 추진은 어렵지만, 민관 협력 모델을 통해 정부의 대규모 보조금이 지급된다면 충분히 도입될 수 있는 기술이다.
한국의 산업정책은 그동안 중소기업 위주의 보편적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정부는 형평성 논란 등을 우려해 대기업 중심인 석유화학산업 지원에 줄곧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탈탄소 전환이 산업 경쟁력의 핵심이 된 지금, 새로 출범한 정부에서 참고할 수 있는 정책은 유럽의 ‘청정산업딜'(Clean Industrial Deal)이다.
청정산업딜은 산업 경쟁력과 탈탄소를 목표하는 정책 패키지로, 탈탄소 전환 계획이 명확한 기업과 시설에 한해 보조금과 대출, 세제 혜택 등을 지원한다. 한국 정부도 선별적·전략적 지원으로 민간투자 위험을 분담하고, 탈탄소 전환을 산업의 미래를 설계하는 정책 축으로 격상할 필요가 있다.
김수강 넥스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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