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이야기에 대한 취향도 점점 변하는 것 같다. 말하자면, 무엇을 무서워하는지가 바뀐다고 할까? 꼬마 때는 무덤에 가서 주검의 간을 파먹는 꼬리 9개 여우 얘기가 너무 무서워서 오줌 쌀 것 같은 기분으로 막 울면서 들었는데, 지금은 설령 꼬리가 100개 달린 여우 얘기를 들은들 목도리 만드는 사람은 좋겠네 하는 반응이 고작일 게다. 이나 1970~80년대 공포영화에서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던 피 쏟는 여귀도 지렁이와 구더기로 변한 국수도 이젠 무섭지 않다.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은 어른이 되면서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대신, 크면서 새롭게 무서워지는 것은 일상이고 자연이고 사람이다. 예컨대 같은 영화는 (보게 해선 안 되겠지만) 만약 꼬마 때 봤다면 별로 안 무서웠을 것 같다. 아마 뭐가 무서운지도 잘 모르는 사이에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마음 푹 놓고 있던 우리 집 어딘가에 실은 누군가 같이 살고 있고 그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바라보며 이 안위를 탐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정말 공포다. 청소하려고 침대 밑을 들여다봤는데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친다든가, 구두를 어디다 넣어놨더라 하며 천장을 올려보다 신발장 꼭대기에서 날 내려다보는 누군가를 발견한다면 심장이 얼어붙을지 모른다.
은 천진한 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가 오금이 저리는 두려움의 배경이 되고 가장 포근해야 할 잠드는 시간이 가장 큰 경계의 시간이 되는 등 섬뜩한 반전으로 가득했다. 공포도 일종의 쾌감인지 나는 조금이라도 감상을 방해받을세라 꼭 혼자 가서 보는데, 마침 관객도 적은 시간대라 충만한 공포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무서운 영화 에서 내게 가장 강렬한 두려움을 느끼게 해준 것은 박수귀신이나 옷장귀신이 아니었다. 제일 무서운 것은 그 엄마의 온 존재를 휘저으며 몸부림치게 만드는 악령이 고른 전쟁터가 바로 그녀의 몸 자체라는 사실이었다. 적이 가진 가공할 힘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그놈이 고른 싸움터가 하필 내 몸이라니. 엄마는, 절대적으로 불리한데다 누가 이기든 간에 내 몸은 무조건 만신창이가 될 수밖에 없는 싸움을, 아이들과 행복했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걸고 목숨을 다해 겪어내고 있었다. 그냥 아침에 팬케이크나 실컷 먹을 수 있고 전학 온 딸들이 다시 학교에 재밌게 다닐 수 있는 삶이면 족한데도 그것이 마치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운 꿈이었던 양 사력을 다해 싸우게끔 내몰리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실은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치르고 있는 삶의 값이기도 하다. 일상은 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부고, 벅차게나마 유지되고 있는 이런 일상조차 깨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공포야말로 그 어떤 두려움보다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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